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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육 Jun 24. 2023

서울여행 - 4

꺼내보지 않으면 풍화되는 추억

 외부강의가 끝이 나서 온전한 휴가가 시작됐다. 다음날 수업의 부담을 안은 날들은 정작 잘 잠들지 못했는데, 수없이 없어 여유로운 날의 전날 저녁은 일찍 잠들었고, 양질의 깊은 잠을 잤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은 잠에 들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씻고 숙소 밖으로 나오니 아직 여름이 찾아오기 전의 햇살 좋은 날이어서 어딜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딜 갈지 고민하다가 안국역에 가기로 했다. 동선 낭비를 최대한 하지 않으면서 갈 만한 곳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유명한 가게에 가서 식사를 하고 나서, 좋은 날을 배경 삼아 한 바퀴 빙 둘러보기 위해서.

 역에서 내려 식사 전 카페에 들를까 하고 어니언을 힐끗 들여다봤다가 끝없이 늘어선 대기 행렬에 깜짝 놀랐다. 예전에 한번 평일 저녁에 갔을 때, 어두운 시간이어서 카페 내부를 잘 즐길 수 없었고 빵도 전부 매진이었다. 한옥 카페의 외관을 제대로 즐기고 갓 구운 빵도 먹으려고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노력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있구나, 생각했다.

 점심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어서 역 인근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그 길에, 어떤 유명한 가게는 노력해도 갈 수 없구나, 생각했다. 그 유명한 런던베이글뮤지엄 앞에 개미떼 같은 인파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오후에 아무 일정이 없어서 시간이 여유롭였기 때문에 한번 기다렸다가 사 먹어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가게 공간보다 두세 배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는, 서울에서의 한정된 나의 시간을 자각하며 그냥 발길을 돌렸다.

 점심으로는 다운타우너에서 아보카도버거를 먹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버거 치고는 비쌌지만, 지방이라면 돈이 있어도 사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니 경험 값까지 치렀다고 생각하니 그리 비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손바닥 두 개만 한 패스트푸드보다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패티며 베이컨이며 아보카도며 각각의 풍미가 다 느껴져서 좋았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꾹꾹 압축된 버거인데 먹는 동안 흘러내리지 않아서 신기했다.

서울사람 같은 한 끼를 끝내고 햇빛이 쏟아지는 종로구의 거리로 나섰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 거리를 메운 사람들, 걷고 싶어지는 풍경. 그 좋은 풍경 속에 휴가의 힘을 빌려 여유로운 이방인인 내 모습까지. 나쁠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삼청동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옥 거리가 나왔고, 사람들이 가득한 그 경사로에 도착했다. 관광지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한 칸 옆의 인적이 드문 경사로를 택해서 걸었다. 다시 휴가 중인 이방인의 서울 여행 느낌을 되찾았다. 따로 지도를 본 것도 아닌데 언덕을 따라 내려와 어느새 경복궁 담장 옆을 걷고 있었다. 마치 비둘기의 귀소본능처럼, 무의식에 의지하며 길을 잃지 않고 종로구를 쏘다녔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청와대가 나타났다. 이 동네를 몇 번 다니면서 청와대를 본 적은 없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일까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들어오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 갈 일은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10분 정도 앞에서 서성거리며 고민한 끝에 드디어 청와대에 입장하려 정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문 앞 안내요원에게 전날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야 말았다. 딱히 들어갈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거절당하니 이상하게 아쉬운 기분이 돼 버렸다. 감정이란 참 묘한 것이다.

 얼추 다 구경한 것 같아서, 저녁에 친구를 만나기로 한 홍대로 일찍 향했다. 또 두서없는 발걸음으로 홍대입구역 근처를 돌아다녔다. 악기 가게를 가볼까 했지만 안 살 것 같은 사람은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이라 생각하니 가기 싫어졌다. 과거 가봤던 카페를 가볼까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딜 갈지 생각하며 서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연장이 늘어져 있는 길에 도착했다. 이 길 어디쯤에서 동아리 친구들과 홍대 공연장으로 향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추억이란 계속 막연해지고 밋밋해지는 것 같다. 계속 꺼내어 보고, 추억의 장소에도 자주 가고, 남겨둔 기록들을 보고, 그래야지만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고민 끝에 목적지를 정했다.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카페 언플러그드에 가기로 한 것이다. 이름대로 카페이지만, 지하에는 공연장이 갖춰져 있고, 간단한 주류와 안주도 판매하는 그런 곳이다.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이유는 월요일마다 운영하는, 음악을 하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대인 오픈마이크 무대에 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살 때는 용기가 부족했고, 지금은 서울과 너무 먼 곳에 있어 월요일 저녁 홍대에 있는 무대에 서려면 휴가 두 개를 사용해야 하는 현실이다. 어쩌면 용기는 여전히 없지만, 서울과 멀어서 할 수 없다고 거리 핑계를 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보고 싶던 곳인데,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는 곳에 가게 됐다. 오랜 숙제를 이번 여행에서 드디어 풀게 된 것이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멋졌다. 두세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전부 음악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사운드 구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카페에 들어서면서 저번 공연 잘 봤다고 인사말을 나누는 사람들, 구석 자리에 앉아 통기타를 튕기는 사람까지. 마치 디즈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디즈니랜드에 온 것처럼,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는 테마파크의 한가운데 앉아있는 것 같았다.

친구를 만날 시간이 되어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퇴근한 직장인 차림의 친구와 접선한 뒤 홍대의 라멘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기분을 내고 싶어 라멘에 교자에 맥주까지 시켰다. 동아리방에서 폭탄주먹밥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었는데 이렇게 사치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를 나누며 배가 터지게 저녁을 먹었다.

 2차로 술집에 가기 전 소화도 시킬 겸 아까 낮에 걸었던 홍대 거리를 친구와 걸으며 예전 동아리 시절 추억을 나눴다.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도 여기 어디쯤에서 공연을 했던 것 같다, 뒤풀이는 여기서 했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같은 시절을 보냈지만 각자 기억하는 부분이 달라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추억이 훨씬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같은 시절을 즐겁게 추억할 수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슬슬 2차로 어디를 갈지 이야기를 하다가, 아까 있었던 카페 언플러그드 이야기를 하니 친구도 가보고 싶어 했다. 그렇게 오후에 차를 마셨던 카페에서 저녁에 술을 마시게 됐다. 친구 역시 카페 내부의 인테리어와 그 안을 채운 구성원들을 보며 신기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음악을 취미로 삼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풍경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수많은 음악 책자와 통기타 사이에 앉아, 인디 음악을 들으며 하이볼을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공연 시간이 되어 대부분은 지하로 향했고, 많이 한산해진 가게에서 우리는 하이볼 두 잔 째를 마셨다. 친구와 나는 서로 그동안 취미를 소홀히 한 것 같다며, 일상으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음악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추억을 나누고, 거기서 힘을 얻어 일상을 다채롭게 할 취미를 가질 힘까지 얻게 된 것이다.

 서울 여행의 마지막 날은 무의식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추억들에 의지해 서울을 서성이고, 자연스럽게 찾아가게 된 많은 공간에서 추억을 되새기며 다시 선명하게 한 그런 날이었다. 꺼내보지 않는 추억은 계속 막연해지고 결국 흐릿해질 것이다. 이젠 서울은 여행을 오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되새길 추억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더는 서울에 여행을 오는 것을 씁쓸해하지 않을 것이다. 좋았던 기억들이 많은 도시,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도시, 이제는 서울을 그렇게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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