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ythewind Feb 18. 2020

이사 여행, 속초 1박 3일편

아무데서나 잘 자는 몸 같은 마음으로

이 동네로 이사와서 처음 사귄 친구인 동네 언니오빠가 곧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 주말마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커플인데 가끔 "같이 갈래?" 물어와도 바쁠 땐 바쁘고 안 바쁠 땐 집순이인 나는 따라 나설 생각이 잘 안 들었다. 그러다 이사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친구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내년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더 보고 살자'는 다짐을 연말마다 하는 게 나란 인간이다. 이별은 아니지만 이사 덕분에 따라 나섰으니 이름은 '이사 여행' 정도로 하면 되겠다. 원래 오빠의 목적은 루어 낚시였는데 날씨가 협조해주지 않아 애저녁에 접었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바람 쐬는 게 목적이었다. 계획은 젊은이들처럼 원대하게 1박 3일.


원대한 계획은 대충 실현되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서 '당근마차'라는 해물포차에서 야식을 먹고, 대충 차에서 자고, 아침 9시에 '만선 생선구이'라는 집에 가서 물곰탕으로 해장을 했다. 카페를 두 군데 들렀다가 체크인 시간에 맞춰 숙소에 도착해 한숨 자고, 속초 중앙시장에 가서 저녁거리를 사와서 숙소에서 먹었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체크아웃 후 중앙시장으로 돌아가 순댓국을 먹고 쥐포와 젓갈, 감태 따위를 사서 서울로 출발. 가는 날은 따뜻했고 오는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속초와 서울 사이에 있는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눈구경을 했다. 금요일 밤 8시에 서울에서 속초로 출발, 일요일 오후 5시 서울 도착.


'당근마차'는 가 본 적은 없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 본 해물포차다. 언니오빠는 와본적이 있다며 나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겼고 너무 흥분해서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던 나는 오징어찜, 골뱅이구이, 털게탕을 띄엄띄엄 시켰다. 호흡을 가다듬고 대미를 장식하는 털게탕을 주문하니 이거부터 드시고 계시라며 굴이 한 접시 나왔는데 다들 작년에 노로바이러스와 굴 양식장의 인분 처리에 관한 기사를 충분히 읽은지라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물은 다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싯가로 십만원이었다는 털게탕이 끝내줬다. 아무래도 내가 털게를 처음 먹어봤나보다. 굵지 않지만 살이 꽉 차있던 다리살이 달콤하고 쫄깃했다. 딱히 기교를 부리지 않은 국물을 한없이 퍼먹었고 안 마셔본 백세주도 반 병은 비웠나보다. 당근마차에서 나온 시간은 새벽 두 시.


차에서 자는 건 생각보다 괜찮았다. 바람이 불어서 낚시는 불가능했지만 날이 춥지 않았고, 전기차인 소형 SUV는 시동을 끄지 않고 차박(?)을 하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전기차의 원리를 잘 모르는 난 그냥 언니가 준 자리인 뒷좌석을 차지하고 롱패딩에 안겨 따뜻하게 쿨쿨 잤다. 실은 속초에 가는 길에도 이미 앉아서 한숨 푹 잤다. 어디서든 잘 자는 건 어딜 가든 무척 편리하다.


토요일 아침 8시 반쯤, 내가 눈을 뜨자마자 차가 해장하러 출발했다. '만선 생선구이'는 오빠가 예전에 동서와 물곰탕으로 해장을 했다가 완전히 반해버린 곳이라는데 과연 국물이 시원했다. 물곰탕 2인분과 생선구이 1인분을 시켰는데 물곰탕은 싯가로 오만원이었다. 신김치로 끓인 게 분명한 깔끔한 콩나물 김치국인데 신선하고 보드랍게 흐물거리는 아구가 들어갔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퍽퍽한 살이 없이 흐물흐물 보드라운 생선이 듬뿍 들어갔는데 한없이 시원한 김치 국물에서는 생선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맛의 존재감을 주장하지 않고 질감만 남아서 매력적인, 이율배반적인 생선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먹으면서 친구랑 새벽 6시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물곰탕을 아침으로 먹고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서울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생선구이는 세 종류가 나왔는데 다 신기할 정도로 별 맛이 없었다.


든든한 해장 후 커피를 마시러 '어나더 블루'라는 카페에 갔다. 물곰탕집에서 적당히 배가 찼을 때 검색해서 찾은 곳인데 여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주말 오픈이 10시 였기 때문이다. 좋은 선택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뷰도 좋았고 커피도, 치즈케이크도 맛있었다. 나는 아이스 아인슈페너, 언니 오빠는 각각 아메리카노 블렌드와 싱글원두를 시켰는데 모두 만족했다. 언니가 커피잔들이 각각 다른 톤의 파란색이라고 지적해서 보니 정말 그랬다. 10시를 약간 넘긴 시간에 도착하면서 우리가 첫손님이려나 했는데 웬걸, 2층 창가자리는 이미 거의 차 있었고 우리가 자리를 잡은 후 곧 전층 만석이 되었다. 붐비지 않았다면 잊지 않고 원두를 사왔을텐데.


어느정도 카페인이 충전되자 우리 중 유일하게 아이폰을 쓰지 않는 오빠가 아이폰의 새 기능을 아느냐고 물어왔다. '단축어'라는 기능이 새로 생겼는데 아이폰 유저들에게 외면받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운 것 같았다.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몇 년 전에 다운받았다가 거의 안 쓰고 지운 '워크플로우'라는 유료앱과 비슷한 기능이었다. 자주 쓰는 반복적인 작업이라봐야 고작 사진 로테이션 기능이라 명령어를 만들어볼까 하고 셋이 달라붙어서 이리저리 시도해보았으나 로테이션 된 이미지를 남긴 후 기존 이미지를 삭제하는 명령이 먹히지 않아서 결국 포기했다. 단축명령을 모아놓은 링크를 알려주어서 그것도 다운받아 보았는데 내가 원하는 기능 구현은 결국 실패했다. 그래도 덕분에 번잡한 카페에서 매우 생산적인 시간을 보낸 기분으로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카페 바로 앞이 바다라 모래밭에 달려나가 사진을 찍었다. 바다가 이렇게 코앞이라 카페 화장실에 '세면대에서 발의 모래를 씻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구나. 흐린날 파도와 구름이 사진으로 담으면 그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처음 알았다. 


커피를 마시고 바다 사진을 찍고도 숙소 체크인 시간인 14시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서 언니가 가보고 싶다던 '설악 산책'으로 향했다. 까페인 줄 알았는데 서점인가봐, 하며 돌아보고나서야 안 사실 - 놀랍게도 그곳은 도서관이었다! 책을 팔지도 않았고 음료를 주문하는 곳도 없었다. 그저 다양한 모양의 책꽂이와 책상이 비효율적이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뻥 뚫린 건물 두 층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복도로 나오니 같은 건물에 '카페 소리'라는 곳에서 장식품이라고 해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멋진 스피커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팔고 있었다. 커피는 그냥 그랬는데 제주 한라봉 제스트가 들어간 마들렌이 아주 맛있었고, 무릎쪽이 엉덩이보다 들린 각도의 카키색 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이 건물의 모든 공간이 멋지고 도서관이 훌륭했기 때문에 나의 상상속의 계획을 변경했다. 토요일 새벽에 친구를 태워서 속초에 도착해 물곰탕을 먹은 다음, 카페 소리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고 오후에는 설악산책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같은 건물 한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로 돌아오면 되겠다. 근데 누구랑 오지?


설악 금호리조트에 체크인을 한 후 밀린 샤워를 하고 다들 낙엽처럼 흩어져서 낮잠을 잤다. 나는 씻고 싶기는하지만 씻는 건 귀찮으니까 언니 먼저 씻으라고 했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바람에 언니는 찬물과의 사투를 벌였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


언니오빠는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했지만 나는 차에서 쭉 자서 그런지 내가 제일 덜 졸렸나보다. 언니오빠는 두 시간 정도 잤고, 나는 한 시간은 책을 읽다가 한 시간 정도 잤나보다. 자다가 배고프고 목이 말라서 깼다. 우리는 귀찮지만 생존을 위해 사냥을 나가는 세 마리 짐승처럼 신속하게 차에 올라 속초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물고 갈증을 풀면서 한 바퀴 돈 후, 지하 수산시장에서 삼만원짜리 숭어 한 마리, 만원짜리 오징어를 두 마리 사고, 만석닭강정에서 뼈 있는 매운맛을 한 마리 샀다. 닭강정집 반대편으로 줄이 있는지 모르고 주문하는 곳이 비었길래 의도치 않은 새치기 주문을 해버렸는데, 그래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주문을 받는 사람이 많았고 줄이 느슨했다. 딸기를 살까 하다가 대신 귤을 샀고, 나오면서 시장 입구 슈퍼에서 지역 소주 동해 한 병, 지역 맥주 아바이 바이젠 한 캔, 그리고 4개 만원짜리 수입맥주를 적당히 섞어서 샀다. 치즈맛 나초와 감자과자와 컵라면도 샀다.


서울에서는 언제부턴가 오징어회를 찾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싱싱한 오징어회가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오징어회를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니 한 마리만 주문해도 된다고 했는데 잠시 더 생각하던 오빠가 다급하게 "두 마리요!"하고 결연한 얼굴로 주문을 수정했다. 언니가 회를 안 먹는 사람이라 둘만 다닐 때는 회는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름에 '도레미'라는 말이 들어가는 쇼를 언니오빠가 좋아하는데 마침 그게 하길래 틀어놓고 저녁을 먹었다. 경쟁적이지 않고, 공격적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한 가지 문제를 전 출연진이 협업해서 함께 푸는 형식이라 좋아한다고 했다.


언니는 밥을 무척 천천히 먹는 사람이다. 최근에 회사 점심 시간에 밥 먹는 속도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어나야 하는 것에 대해 몇 번이나 불평했다. 나는 밥을 잘 먹고 빨리 먹는 편인데, 언젠가는 천천히 먹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오빠는 뭘 해도 늘 느긋한 사람 같다.


나는 이것저것 섞어 먹는 걸 좋아해서 주식과 후식을 동시에 꺼내놓고 먹기 때문에 오빠가 다 차린 밥상에 과자와 귤도 가져와서 같이 먹었다. TV 덕분에 자연스럽게 평소 속도보다 천천히 먹게 되었고 드디어 만석닭강정만의 개성을 알 것 같았다. 예전에도 먹어보긴 했는데 배가 고픈 상태로 허겁지겁 먹었는지 이렇다할 기억이 없었다. 이번에 먹어보니 평범하게 매콤하고 평범하게 달콤한데 마지막에 킥이 있네.


오빠는 동해 소주를, 언니는 속초 수제 밀맥주 아바이 바이젠을, 나는 4병 만원 수입맥주 에딩거를 마셨다. 술을 전혀 안 마시다가 요즘에야 조금씩 마셔보고 있는데, 각자의 술은 각자 챙겨 먹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운 사람들하고만 술을 먹으니 내가 주도가 늘지를 않는다.


도레미가 출연자 전원이 크림빵을 한 입씩은 먹어본 훈훈한 상태로 끝나자 TV를 껐다. 내가 집에서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리는데 원두를 살 때 에스프레소보다 굵게 갈아야 하는지 가늘게 갈아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깊은 토론과 검색을 하다가, 우리가 사랑한 고양이 커리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 오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가 말았다가 하는 와중에 언니의 조카에게 영상통화 전화가 왔고, 오빠는 아들에게 전화기를 건네받은 동서에게 '그 때 그 물곰탕집'에 간 이야기를 했다. 나는 배가 불러서 과자와 함께 산 물약 소화제를 마셨고, 그러고도 마지막 코스인 컵라면은 포기했다. 오빠는 컵라면을 먹고 수입맥주 4캔 중 마지막 캔으로 입가심을 한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불은 낮잠자고 일어난 모양 그대로 방마다 이미 깔려 있었다. 우리는 간신히 양치를 하고 각자 방 하나씩 차지하고 누웠다.


저녁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순댓국 골목을 지나면서 내일 아침엔 이걸 먹자고 했었다. 계획은 최대한 안 만들거나 유연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 내일 컨디션 보고 그러자고 했고, 다행히 우리는 다음날 아침 11시쯤 국밥 골목으로 돌아왔다. 나는 순댓국 골목을 본 순간부터 여기 순댓국밥을 꼭 먹어보고 싶었다. 난 여행이든 일상이든 먹는 계획만큼은 유연하게 잡는 사람이 아니다. 광주와 부산의 국밥은 충분히 먹어봤는데 강원도의 국밥은 먹어본 기억이 없어서 더 그랬다.


나는 순댓국 골목 입구에 삼초쯤 눈에 힘을 주고 서서 사람이 많이 들어가는 집을 찍었다. 별 관심없던 언니 오빠의 동의를 받고 기세등등하게 그 가게에 들어갔는데 1층이 왁자지껄 만석이었다. 2층 좌석에 가보라고 하셔서 계단을 오르니 여전히 사람은 많지만 훨씬 조용한 공간에 딱 한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셋 다 만원짜리 모둠순댓국을 시켰는데 대만족이었고, 건더기가 너무 많아서 국밥 러버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감수하고 좀 남겨야 했다. 와 지금도 믿을 수가 없네. 순대보다도 국밥 안에 든 고기가 정말 맛있었다. 언니는 김치가 너무 무성의해서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김치에 아무 임팩트가 없었는데 김치에 손이 갈 틈이 없을 정도로 국물을 퍼먹었던 것 같다. 우리가 간 집의 이름은 장터순대국.


<피프티 피플>의 절반 이상은 서울로 돌아오는 차에서 읽었다. 전기차가 소음이 없는 건 알았는데 진동도 적은 편인지 글자가 떨리거나 눈이 피로하지 않았다. 잠을 많이 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금요일에 출발하면서 메세지를 주고 받던 친구에게 속초에 간다고 말하니 밑도 끝도 없이 카페 링크를 보내주었다. 당연히 속초에 있는 곳인줄 알았는데 링크를 눌러보니 서울과 속초 중간에 있었다. 아니 이걸 왜 보내주는 거지 하면서 언니에게 지나가듯 언급만 했었는데, 서울에 돌아오는 길에 들르게 되었다.


'분덕스'. 사진에서 크로아상이 맛있어 보여서 빵을 먹으려고 했는데 오후 두 시도 안 되었는데 빵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다행히 레몬타르트가 있어서 같이 먹었고, 새콤한 맛에 엄격한 언니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오빠는 옆에서 "뜨끈~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속이 풀린다"며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은 말을 했다. 우리 외에는 전부 스키장에 다녀오는 게 분명한 사람들이었고, 아침부터 스키를 타고 오느라 배가 고파서 빵을 솔드아웃 시킨 게 분명하다고 나혼자 생각했다. 언니 오빠는 보드복을 낚시복으로 활용할 방법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눈이 쏟아졌다.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산 중턱 위에만 눈이 덮여있고 구름인지 안개인지가 자욱해서 멋졌는데, 순댓국을 먹고 서울로 향하는 길은 말 그대로 '설경'이었다. 언니는 카페에 앉아 창 너머로 펄펄 눈이 쏟아지는 걸 보며 예쁘다고 좋아했고, 나는 그런 언니를 보며 어른 경력 1n년 후에도 낭만을 유지하는 비결이 뭔지 궁금해했다. 곧 운전대를 잡을 사람이 어떻게 펑펑 내리는 눈을 진심으로 반기고 좋아할 수가 있지. 오빠는 커피 머그를 창가로 옮기더니 내리는 눈을 배경으로 슬로우모션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렸다. 나만 낭만이 없는 어른이네. 하긴 낭만이 있는 사람들이니 1박 3일 여행을 떠나고, 낚시 없는 낚시 여행을 불평없이 즐길 수 있는 거겠지.


카페에서 나와 전기차 충전을 위해 휴게소에 들렀는데 두 대가 충전중이고 대기차까지 있길래 근처 다른 충전소를 검색해서 발길을 돌렸다. "지금도 집까지 갈 수는 있어요. 가서도 좀 다닐 만큼 충전해두려는 거죠." 전기차 충전에 대해 언니오빠는 늘 이렇게 말한다. 예방할 수 있는 불안은 존재조차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전통 내연기관 엔진 자동차에서 아마 꽤 오래 벗어나지 못할 나에게.


그런 불안을 감안하고도 심각하게 고려해보고 싶을 정도로 장거리 여행시 전기차의 연료비 경쟁력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교통비는 거의 안 든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으니까. 갈 때는 롱패딩이 어색할 정도로 따뜻했지만 오는 길에는 거의 내내 폭설이 내렸는데 전기차라서 더 불안할 것도 없었다.


익숙한 풍경이 보이길래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금 강변북로냐고 물으니 운전을 하던 언니가 그렇다고 답했다. "벌써?"라고 되묻자 이게 다 카페 '분덕스'의 위치가 좋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친구야 고맙다.


나는 서울에 있는 사람들과 나눠먹으려고 아바이 바이젠을 두 캔 사왔다. 신맛이 전혀 없는 귤은 맹맹한 맛을 좋아하는 내가 챙겼고, 절반정도 남은 닭강정은 언니가 챙겼다. 마지막에 들른 까페에서 교통비와 숙소비를 제외하고 먹은 비용을 합해서 3으로 나눈 금액을 정산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얼마나 삶이 풍요로워지는지 알지 못했다."


정세랑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에 나오는 말이다. 앞부분에서 나온 말이라 여행 내내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혼자라면 안 했을 것, 혹은 피했을 것을 허용하고, 침범당한 후에 그 효용이 플러스일 때의 결과다. 원한 적 없는 것을 허용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얻은 것이 나에게 플러스일지 마이너스일지는 선택하는 당장은 알 수 없는 것.


'나는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 낚시를 같이 가자고 하지?'

'그냥 언니오빠랑 맛있는 거 먹고 같이 놀러 가는 거지 뭐. 우리 동네에서 같이 밥 먹는 것처럼.'

'내가 있어서 불편한 점이 있을텐데, 지금 이게 불편할까? 이따 저게 불편할까?'

'아, 평소에는 둘만 있을 땐 회를 주문 못하는구나. 그럼 이것만큼은 내가 있어서 좋겠네. 다행이다.'


나라는 존재의 효용을 증명하고, 더하기 빼기 후에 남는 게 플러스이도록, 최소한 마이너스이지는 않도록 안절부절해야하는 게 나의 입장이고 나라는 사람인데, 언니 오빠는 그런 게 필요없는 관계임이 너무나 잘 보인다.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관계라는 것이 꼭 효용있는 가치의 교환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관계.


집에 도착해서 빨래를 돌린 후 얼마 전에 주문한 책을 옆구리에 끼고 휘적휘적 동네 샐러드집으로 향했다. 그 책에는 '혼자사는 사람의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귀여운 단편 5개가 실려있었는데, 그 중 한 작품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오늘이 지나고 똑같은 내일이 올 테고, 나는 마냥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살아가겠지. 그 일상이 지금 나에게는 지나치게 흡족해 더 이상 무엇도 더 필요하지 않다는 만족감이 밀려왔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책은 이한나 소설집 <나의 빌라>, 이 단편의 이름은 <완벽한 혼자>.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배우자가 있는 것도 좋고, 없는 것도 좋고, 그런 친구가 되는 것도 좋고, 그렇지 못해도 좋고. 덜 증명해도 괜찮은, 아무데서나 잘 자는 몸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관계의 허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