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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thewind Dec 16. 2019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 노승영·박산호 지음

직업으로서의 번역가, 생활인으로서의 번역가가 궁금하다면

자신의 직업을 주제로 쓴 에세이라면 읽는이가 '에잉 이 직업도 (너무 게으른/꼼꼼하지 못한/잠이 많은/겁이 많은 등) 나는 못하겠군', 이라는 생각히 들어야 충분히 솔직하고 정보값이 높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애로사항을 충분히 밝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 직업으로 먹고 살만하다는 건 저자가 그 업에 일정 기간 이상 종사했다는 것, 그 분야 종사자의 입장에서 책을 냈다는 것으로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역시 난 출판번역을 생업으로 삼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전업 번역가가 될 사람이라면 나처럼 쉽게 좌절하지 않을 것이고, 예비 출판 번역가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가장 많이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기존에 칼럼 등으로 발표한 글모음이라는 걸 몰랐기때문에 단행본을 위해 계획하고 한 호흡으로 쓴 책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1/3 쯤 읽었을 때 내가 예상한 단점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잘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정하고 한 호흡으로 써도 이보다 더 적절한 구성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두 분 다 베테랑 번역가이면서 아주 솔직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다. 솔직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역이나 결과적으로 욕을 먹게 된 번역의 이야기를 보며 나도 이렇게 솔직한 글을 쓸 수 있을지 아득했다. 자신의 실수나 부족함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방어를 잘 하는 사람은 방어적이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수를 소상히 밝히는 부분마다 글쓴이가 한없이 멋있었다.


최근 '숲'이 아닌 '나무' 차원의 오역에 대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이 더 정리되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수학중인 동료 통역사가 그곳에서 처음 배운 충격적인 가르침은 'original text'가 아닌 'source text'라는 것이라고 했다. 번역은 글쓰기고 창작이니(여기까지는 익숙하다), 네가 읽은 것을 원하는 대로 새로 쓰라고 배운다고 한다. (원하는대로요?!) 나는 "문장을 자르거나 붙여도  돼? 문단 나누기를 마음대로 해도 돼?" 같은 지엽적인 질문을 하는데, 친구의 대답은 거의 무조건 "다 해도 돼" 였다. 한국  문학이라는 '원재료'로 새로운 작품을 쓴다고 생각하라고 배운다고 한다. 왜? 읽히는 문학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명백하고 자잘한 오역이 여러 군데 발견되어 비판을 받은 데보라 스미스에 대해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는 대화였다. 물론 이것은 한국 문학을 다른 나라 독자에게 소개할 때의 경우고, 한국 출판 시장의 영한 번역에서 역자에게 이정도의 자유가 허락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번역가의 역할과 재량권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두 번역가가 각자 기고했던 글을 나열하기도 하고, 같은 주제에 대해 한 꼭지씩 주고 받기도 하는데 그 중 옮긴이 후기에 대해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큰 도움이 되었다. 혹시 옮긴이 후기 쓰실 일 있으면 꼭꼭꼭 이 책을 읽으십시오. (듣고있나 일년 전의 나!)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유추하면 노승영 번역가는 기혼 유자녀 가정을 가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반면, 박산호 번역가는 자녀가 한 명 있다는 것 외에 가족의 형태가 불분명하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등장하지 않고 '가족'이라는 표현과 딸 양육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에 책만 보면 기혼일 수도, 이혼한 싱글맘일수도, 혼인과 관계 없이 자녀만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그 불분명함이 좋았다. 박산호 번역가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저글링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유한 뒤 "녹록치 않은 형편일 여성 프리랜서들에게 동료애를 느낀다."고 적은 부분에서는 육아를 안 해본 나도 가슴이 저릿했다.


관련업계 종사자의 입장에서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조언도 많았는데 특히 사전과 장비 추천 글이 무척 유용했다. MS 버티컬 마우스 추천은 여기저기서 들어봤지만 고려만 하고 있었는데 "고장나면 똑같은 제품을 살 예정"이라는 노승영 번역가의 추천글을 읽고 당장 주문했다. 


잘 알려져 있듯 출판 번역은 노동의 강도와 노력의 양에 비해 보수가 높지 않다. 때론 이렇게 고차원적인 고민을 치열하게 하는 직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서 고생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접한 모든 번역 관련 서적에서 역자의 '사명감'이 묻어났을 것이다. 보수가 높지는 않지만 생활은 유지되는 문턱에 있기 때문에 시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일테고, 같은 실력으로 훨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다른 번역 시장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수 대비 '쓸고퀄'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출판 번역가와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돈은 좋은 것이지만 돈이 전부인 것은 아니니까. 돈을 우선순위의 최상위 자리에 놓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더 쉬운 삶'을 자랑하고 홍보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선택을 한 직업군을 후려치는 것은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된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오만일 뿐이다.


이 책을 일년만 일찍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자인 노승영 번역가와 박산호 번역가의 말투는 다정하다기보다 자조적인데 결과적으로 그래서 더없이 다정하다. 아마도 초보 번역가였던 과거의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고 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출판 번역 시장에 진입을 노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효용이 있을테지만 그냥 남의 삶이 궁금하고 에세이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직업으로서의 번역가, 생활인으로서의 번역가가 궁금하다면 이 책이 많은 궁금증을 풀어줄 것이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번역 지침서 추천 모음 (밑줄 친 건 내가 읽어본 책)

<번역의 탄생> 이희재 (음 쭉쭉 읽히는 책은 아니라 다 읽진 못했다. 집에 모시고만 있다 ^_ㅜ)

<번역은 글쓰기다> 이종인

<갈등하는 번역> 윤영삼

<말 바꾸기> 모나 베이커

<번역가를 위한 우리말 공부> 이강룡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열린책들 편집부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 김철호

<Style 문체> 조셉 윌리엄스

<언어본능> 스티븐 핑커

<한글의 탄생> 노마 히데키

<한국어 어원 연구> 이남덕



작가의 이전글 <출근길의 주문>을 읽자마자 세 권 더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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