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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연재 Jun 27. 2024

마그리트가 세상의 모순을 표현하는 방식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사유하는 그림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억울한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땀 흘려 번 돈이 세금으로 흘러가 알지 못하는, 혹은 엉뚱한 곳에 쓰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나, 존재하지 않는 가상 이미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수세기 동안 돈벌이 마케팅으로 사용되는 현실 같은 걸 보면, 세상에 질서나 진리라는게 있나? 라는 의문이 든다. 


콩 심은데 꼭 콩이 나는 결과를, 팥 심은데 반드시 팥이 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알게 된다. 왜냐면 세상은 모순 덩어리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계획으로 흘러가 예상 밖의 결과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낯설게 다가오는 것들을 친근한 것으로 바꿔버리려는 경항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


이러한 현실을 예술은 알고 있다. 예술은 만물의 불확실성, 비이성, 비논리적인 요소들을 포용한다. 세계 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에서 시작된 예술 사조 ‘다다이즘’은 전통 예술의 판도를 뒤집었고 예술 창조의 비이성적인 면모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다이즘은 전쟁이 야기한 공포와 인간의 잔임함, 사회적으로 타부시 되었던 모든 것들을 피부로 경험하면서 완벽한 비율과 질서 정연한 아름다움의 가치를 높이 샀던 고전적인 예술을 부정했다. 합당한 이유와 이성적인 논리 없이 수백만명의 삶들이 공중분해 되는 인간의 잔혹함을 보며, 다다 예술가들은 기존에 지켜왔던 자신들의 관념, 신념에 대해 의문이 가지기 시작하며 이 전에는 예술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던 것들을 예술의 범주로 끌어다 놓기 시작했다. 


벨기에 출생,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는 다다이즘운동의 일원은 아닐지라도 다다이즘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초현실주의의 물결에 올라탔다. 벽지디자인, 그래픽 아티스트와 추상 화가로 활동을 했었다가 파리로 거처지를 옮겼다.



René Magritte. Le Jockey perdu (The Lost Jockey)

1924년 즈음부터 마그리트의 새로운 방향성이 보이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길을 잃은 기수 the Lost Jockey>다.  1920년 초반 브뤼셀에서 마그리트는 Theatre du Groupe Libre 무대 센트 디자인을 했었다. 그때 진행했던 무대 디자인 세팅에 커튼을 추가해 그려 넣었다. 무대 세트라는 설정을 알고 보니 자연스러운 느낌은 사라진다. 나무 악보들이 그려진 빌보켓은 나무처럼 무대 위에 배치되어 있고, 말에 올라탄 기수와 말은 상당히 빠르고 다급해 보인다. 바닥의 기하학적인 형태는 직조를 짠 그물 같은 느낌을 주며 경직된 분위기를 만든다. 양 옆에 무심하게 배치된 커튼은 기수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어떤 속도로 가는지 전혀 체감할 수 없게 만든다.  어떤 맥락인지도 알 수 없게 만든다.


일률적인 서사를 읽어내기에 역부족이며, 역동성과 정적인 움직임이 함께 공존하는 그림이다. 겉으로 보는게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찜찜함과 계속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물음표를 안고 보게 되는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이 여기서 시작된다.


본격적으로 마그리트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나 풍광들을 주제로 삼았다. 그의 그림은 상당히 세밀한 묘사로 그럴듯한 현실감을 선사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협화음을 창조한다. 이 불협화음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데페이즈멍’ 기법 덕분이다. 프랑스 단어인 ‘데페이즈멍 dépaysement’은 ‘나라나 정든 고장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 사상에서는 특정 물체를 원래 있던 곳에서 이동시켜 뜻하지 않은 장소와 맥락에 놓아 충격적이며 낯선 느낌을 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이상의 오브제를 대치하게끔 하여 기이하고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 점이 특징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아래로 흐른다. 이것이 당연하게 우리가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자연의 이치이지만, 그물처럼 복잡하게 짜인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당연한 이치들보다는 “왜 그런 거지?”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것들이 더 많다. 수백 년 동안 지켜져 온 관습이나 전통적으로 당연하다 여기는 것, 그 표면 아래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쉽게 지나쳐버리는 숨은 의미나 진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중 매체로 셀 수 없는 정보들이 넘쳐나기에 대세를 이루는 흐름에 휩쓸리며 그것이 진짜 사실인 냥 믿어버린다. 한 치의 의심이나 객관적인 사고 끝에 내리는 판단도 없이.


마그리트는 이러한 현상, 인간의 인지과정에 개입하여 데페이즈멍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유하게 만든다. 그림을 통해 사유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마그리트 그림의 매력이다. 

원래 익숙한 것에서 스산함과 공포감을 느끼는 것처럼, 마그리트는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평범한 물건, 환경을 우리에게 익숙한 맥락에서 옮기거나 서로 연계가 없어 보이는 오브제를 접합시켰다. 그때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생긴다.



연인 2

<연인 2> 

남녀가 서로의 온기와 감각을 느끼기 위해 사랑을 속삭이는 키스를 하려 한다. 그러나 얼굴은 천으로 모두 덮여 있다. 그저 얼굴만 가렸을 뿐인데, 어딘지 모르게 공포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먼 사랑에 빠진 것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사랑에 회의감에 들어 그 누구라도 입을 맞출 수 있는 내면의 무감각함을 표현하는 것일까? 마그리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인간의 아들

<인간의 아들 The Son of Man> 

자신의 자화상에 뜬금없이 사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대신 왼쪽 눈은 빼꼼 앞을 볼 수 있게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않았다. 마그리트가 시야를 열어둔 이유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숨겨진 것들을 염탐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그것을 파해치기 위해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격양되는 감정들을 느낀다. 마그리트는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를 간파한 셈이다. 안 보이면 보고 싶고, 가리면 보고 싶고, 다 드러나도 왠지 숨겨진 걸 파헤쳐 보고 싶은, 인간의 복잡한 본능을.


우리가 보이는 것을 사실대로 그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통찰력

<통찰력, 1936>

이 그림은 마그리트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그림 속 마그리트는 그림을 그리고 있고, 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이게 어떤 생명을 품고 있는 알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통찰력은 '사물이나 현상을 통찰하는 능력'이라는 뜻을 통해 유추해보 듯, 마그리트는 아직 부화되지 않은 알을 보면서 '부화하여 성장한 뒤 최종적으로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가 될 미래'를 통찰한다.




<선택적 친화력, 1933 >

선택적 친화력
“어느 날 밤, 나는 방에서 깨어났다. 그 방에는 새가 잠자고 있는 새장이 놓여 있었다. 멋진 착오로 인해, 나는 새장 안에서 새 대신 알을 보았다. 그때 나는 새롭고 놀라운 시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충격은 바로 서로에 대한 두 사물의 친화력에 의해 유발되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 충격은 서로 무관한 두 사물을 함께 연결한 데 기인한다.”
- 르네 마그리트-

이 그림은 새장은 새가 살아가는 집, 보금자리라는 당연한 연계적 사고를 파괴한다. 마그리트는 잠에서 깨어나 새장에 새 대신 알이 있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알 속에 어떤 생명체가 있던,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생명체가 알을 탁 깨고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 넓은 하늘 대신, 단단하게 고정된 쇠창살을 처음 마주하게 될 것이다. 쇠창살 너머에 있는 세상과 새장 안의 세상, 이 모든 것을 다 바라볼 수 있게 되지만 자신이 안전하다는 안락함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갈망이 함께 존재할 것이다.  

그 알 속에는 무엇이 있을지는 보는 이의 몫이다. 사람일지, 동물일지, 추상적인 아이디어일지 말이다.



마그리트는 당연하게 사고하고 인지하는 것들 사이사이에 간극을 벌려 놓는다. 특히 아리송하게 짓는 제목들이 한몫한다. 그는 일부러 관람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제목을 그림과 단번에 어울리게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림 제목을 통해 그림의 의미와 서사를 유추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당연한 일련의 과정 역시 단절시켜 버린다. 

그래서인지, 마그리트의 작품은 몇 년 전에 보고 의미를 안다고 해서 그게 지속되지 않는다.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유추하게 만든다. 최근 몇 년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떠한 새로운 생각들을 했는지에 따라 마그리트의 그림은 코믹스럽기도, 공포스럽기도, 미스터리하기도 하다. 점잖고 고요해 보이는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친근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친근하게 만들어보는 역동성과 역설적인 의미는 계속해서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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