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연재 Dec 14. 2022

알약의 마술사

얄약을 한번에 원샷한 엘


점심으로 짭짤한 간장새우 덮밥을 먹었다.

봄에 시집 간지 3개월 된 새색시가 된 동생 엘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친동생은 아니다. 10여년 전 대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엘이 나의 친동생이든 사촌 동생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했었다. 오래 된 지인들 중 귀염성과 호기심 가득한 성격을 가진 친구이기 떄문이다. 나는 요즘 인생 다 산 할매 처럼 타인에 대한 재미를 더 이상 못느끼니 참새 처럼 재잘거리는 귀여운 친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행히 혀를 반으로 말아 넣은 듯한 말투로 애교를 떨지도 않는다. 서른 중반이 다되었는데 친근감의 표시를 혀가 없는 듯한 말투로 하면 등에 알레르기가 난다. 그게 아직도 귀엽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을 보면 큰일이지 싶다.

이십 대에 처음 만난 엘은 여름에 뿌리는 쿨한 바다향의 향수 같았다. 정감 있는데 쿨한 사람 찾기 쉽지 않아 아직도 계절이 바뀔 때 꾸준히 연락을 지속한다.


엘은 말이 엄청 빠르다. 그리고 환장의 콤비 인냥 나의 청력은 좋지 않다.

중학교 때부터 그래왔다. 그래서 둘이 대화할 때 귀를 좀 더 열고 목을 빼게 된다. 그래야 조금 더 잘 들리니까.

엘의 입에서 단어가 쏟아져 나올 때  "좀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라고 말하는게 일상이었다.

마치 외국인에게  "Could you please speak slowly?" 라고 부탁하는 것 처럼.

엘은 나의 작은 부탁에 "알겠어요!" 하며 천천히 말해준다. 그러다 다시 재자리다.

그러면 난 당황하지 않고 뜰 채를 가지고 최대한 집중해서 엘의 단어들을 건지기 바쁘다. 그래서 가끔은 토플 리스닝 시험을 본 것 같은 시간인 듯 한 느낌이 든다. 아마 유재석 같은 돌출입 구강구조를 가졌다면 조금 더 수월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출 입은  하관의 면적이 커서 단어들을 모아 두었다가 탁총처럼 쏘 듯 얘기할테니 찰기 나는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엘의 쪼끄만 입은 쉬질 않는다. 딴 생각 하는 찰나 또 엘의 말을 놓쳐버린다.




엘과의 식사 20분 만에 새우 꼬리만 그릇에 남았다. 배가 너무 불러 잠시 몽롱했다.

나랑 엘은 지극히 평범한 여자인지라 마치 국룰 처럼 짜여진 룰을 따른다. 배불러도 디저트 먹기. 왜인지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아무리 배가 부른 상황에서도 디저트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을 손 두마디 정도 만들 수가 있다. 아마 이건 누군가 연구해서 논문을 써도 될 것이다. "디저트에 대한 여자들의 위장 가동범위" 라는 제목으로.

디저트를 더 여유있게 먹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더러워진 테이블을 닦고 선물로 사가지고 간 과일 생크림 케이크를 꽃무늬 접시에 셋팅했다. 그동안 엘은 설겆이를 끝냈다.


"빨리 하고 와. 디저트 먹게"

"응 언니 잠깐만, 나 까먹기 전에 약 좀 먹어야 되서."


부엌 서랍장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영양제 통이었다.

엘은 영양제를 하나 둘 꺼내더니 손바닥에 열 두알을 쥐었다. 그리고  많은 알약을 한번에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물은 모자랄만큼  한모금을 마시고 꿀꺽 다 넘겼다.

바로 눈 앞에서 본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엘! 너 그걸 지금 한번에 다 먹은거야?”

“응 다 먹지”

“그걸 어떻게 다 넘겨?” 너무 신기했다.

“이걸 다 못 먹어? 언니는 어떻게 먹는데?”

 놀라워하는 내가 웃기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난 그걸 서너번 걸쳐 나눠 먹지. 아마 난 한개씩 먹을거야"

"언니 그럼 어느 세월에 다 먹어. 목구멍이 작은가보다...난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먹었어. 지금은 별로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어릴 때 티비에서 본 유리겔러가 숟가락을 초능력으로 엿가락 처럼 휘게 만든 것보다 알약 넘기는게 더 신기했다. 이건 어떤 트릭이 아니라 엘의 일상 생활 루틴 중 하나이지 않은가.

"우와 엘 진짜 너 그거 장기다 야”

"푸핫 언니 뭐 이런게 장기야? 우리 가족들 다 이렇게 먹던데?"

"난 많이 먹는 것도 신기한데 더 신기한게 뭔줄 알아? 넌 그 많은 약을 먹는데 목을 뒤로 젖히지도 않고 그냥 음식을 넘기듯 넘기잖아. 그게 장기지, 다른게 장기니?"


"그래서 어떻게 벌리는거야.. 목구멍을? "

"하하 언니 그런게 어딨어. 그냥 눈 감고 삼키는거지."




집에 돌아와 먹으려고 샀다가 항상 크기 때문에 실패해 방치한 비타민 통을 바라보았다. 보기만해도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엘을 따라 다시 먹어보자 다짐했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 마시고 물을 한 모금 물었다. 그런 다음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비타민 알약을 혀로 차 세로로 안치되게 각도를 계속 맞춰갔다. 알약은 내 목구멍 가장 가까운 입구에서 세바퀴를 돌았다.


밤 12시에 내가 이 비타민 하나 먹으려고 이렇게 각을 재야되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고개를 앞 뒤로 흔들면 상체도 앞뒤로 흔들거린다.  리듬을 타며 목을 뒤로 져쳐 알약을 목구멍에 닿게 하고, 지체 없이  머리를 앞으로 숙일 때 약을 꿀꺽 삼켰다. 눈물이 찔끔 났다.

알약의 뾰족한 부분이 연한 목 피부를 할퀴며 내려갔다. 후통 때문에 목안이 벌게지고 승모근이 바짝 위로 솟았다.


건강을 향한 작은 루틴이 왜 이리 힘들까.

연달아 오메가3 두 알을 한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바로 입에 손을 넣어 한알을 다시 뺐다.

이 밤에 알약으로 두드려 맞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마무리하려 침대에 누웠는데 마술 처럼 엘의 입에서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그 많은 약들이 또 떠오른다.  

그러다 불현 듯 깨달았다.

엘의 하고 싶은 말주머니는 매번 목구멍에 저장되어 있다 나온다는 것을.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