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Sep 22. 2022
'떨어지는 야자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으면 즉사할 수 있을까?'
'빗맞아서 안 죽고 다치기만 한다면?'
'이리 사는 것도 버거운데, 고통스럽기까지?'
고개를 살살 젓다가 바다를 향해 인사하듯 비스듬히 서 있는 야자나무한테서 섬 안쪽의 숲처럼 어두운 영감을 얻었다.
숲에는 대마 비슷하게 생긴 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가늘게 쭉 찢어서 엮어 보니 밧줄로 쓸 만했다. 처음에는 집 짓고 나중에는 뗏목 만드는 데 요긴하게 썼다.
하지만 높은 파도의 벽을 넘지 못한 뗏목이 암초 사이에 처박혔을 때 깨달았다. 이 섬 전체가 나를 꽁꽁 묶고 있는 밧줄이나 다름없다는 걸.
밧줄을 풀어 줄 구조의 손길이 닿기 전까지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야자와 게와 소라와 각종 열매 따위로 연명했다. 고기잡이를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숲에 사는 야생 닭을 사냥하는 데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비행기 한 대와 어선 한 척이 멀리 지나갔다. 바닷가에 새겨 놓은 커다란 SOS 표지도, 젖은 장작을 태워서 피워 올린 연기도 소용없었다.
두 해 전에는 흰 돛을 달고 수평선 위를 미끄러지듯 떠가는 요트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이후에는 하늘 쪽도 바다 쪽도 감감했다.
이제나저제나 하던 마음이 수평선처럼 드러누웠다. 채취와 사냥으로 연명하는 시간은 바다 보며 멍때리거나 쓰러져 자는 시간으로 흘러갔다.
딴 날과 다름없이 기신기신 한나절을 보낸 어느 날, 해 저문 수평선을 응시하던 나는 마음속 깊숙이 묻어둔 위험한 불씨 한 점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지난 5년 동안 땡볕과 스콜과 독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준, 나무와 풀로 지어진 집에서 불꽃이 일었다.
나는 바다를 향해 인사하는 야자나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밤의 검은 장막 속에서 일렁이는 불꽃의 조명을 받은 나무는 요기스러웠다. 비스듬히 뻗어 올라간 그것 아래서 위를 쳐다보았다. 이윽고는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줄기의 3분의 2 정도를 올라간 나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섬 안쪽의 숲처럼 어두운 영감의 실체. 요기스런 나무에 달린 1년 묵은 열매가 손에 잡혔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을 찔렀다. 저만치서 꾸우우꾸우 하는 야생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열매를 잡아당겨 목에 걸었다. 그리고 곧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목을 옥죄는 열매. 아니, 올가미. 터질 듯한 핏물의 내압에 짓눌린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찰나,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둔중한 통증. 죽지 않고 다치지도 않았노라는, 비와 바람과 햇빛에 삭은 올가미 줄이 끊어진 모양이라는 각성이 들 즈음, 모랫바닥에 반쯤 묻혀 있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보았다. 섬으로 다가오고 있는 불빛을. 바야흐로 절정에 이른 불꽃이 붙잡았을, 5년을 묵었어도 당최 삭지 않는 밧줄을 풀어 줄 구조의 손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