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와 함께, 플라잉

간편소설 아홉

쉰 중반쯤 됐으려나. 그 여자가 내민 박카스를 받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 김 씨가 그랬잖아, 배춧잎이 세 장이라고. 꼬박 사흘 벌인데, 그걸 한방에 까먹을 순 없지. 암만 그 여자가 죽은 마누라를 닮았어도 말이야. 근데 박카스 말고 빈 박스나 있음 달란 말은 자발없이 왜 했을까. 미친 영감태기라는 욕이나 얻어먹을 소릴.


기분 탓인가. 어제보다 덜 실었어도 갑절은 무겁구먼. 키만큼 폐지를 쌓아봤자 한 리어카에 겨우 육천 원 받을까 말깐데, 내달부턴 킬로당 십 원을 더 깎는다니…… 휴, 어쩐다. 박 영감 따라서 시청 쪽으로 나가봐야 하는 건가. 자주는 아니지만 한번 나가서 으쌰으쌰 하면 벌이가 쏠쏠하다던데. 그래도 쯧쯧, 참아야지. 약국 선생이 그랬잖아, 정신 나간 짓들 한다고, 노망난 꼰대들이라고. 갈 때마다 박스에다 박카스까지 한 병씩 챙겨서 내주는 사람에게 욕먹고 살 순 없잖아.


예서 좀 쉬었다 갈까. 벌써 해가 뉘엿뉘엿하네. 하루가 금방이야. 배는 지랄 맞게 고파도, 노을은 환장할 정도로 곱구먼. 사람 늙는 것도 저럼 좋을 텐데. 볼품없이 시들거리기만 하니, 원. 쓸쓸하고, 막막하고, 시리고…… 이거 참, 나도 주책바가질세. 청승 그만 떨고 후딱 일어나자고, 날 어두워지기 전에.


정신 차려, 여기서부턴 내리막길이니까. 리어카 뒤쪽을 최대한 바닥에 붙이고서, 그래, 천천히. 근데 길이 미끄럽네. 낮에 잠깐 비 온 게 마르질 않은 모양이야. 어두워서 앞도 잘 안 보이는데, 자꾸만 미끄러지네. 발을 뻗어서, 어떻게든 버텨야 되는데, 아, 어쩌누. 브레끼가 안 걸려. 점점 빨라지네, 이거. 큰일 났다. 위험해. 허, 헉!


몸이 붕 떠올랐다. 리어카도 붕 떠올랐다. 캄캄한 허공 속으로 날아오른 몸은 이내 머리부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리어카에 실린 폐지들도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추락하던 몸이랑 폐지들을 받아낸 건 바닥과 벽면이 둥그렇고 커다란 수조였다.


풍덩, 풍덩, 풍덩…….


어리둥절한 사이, 위에서 덮개가 닫히더니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아래에서는 소용돌이가 올라왔다. 폐지들과 함께 소용돌이에 휘감긴 몸은 수조 바닥에 뚫린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 물이 들어차기 시작한 수조 안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