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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운장 Sep 01. 2020

영화 기생충 살인 장면 해석

기생충 클라이막스 씬에서 기택(송강호)은 박사장(이선균)을 칼로 찌른다. 기택은 상징적인 행동을 하는데 자신이 쓰고 있던 인디언 모자를 벗고, 박사장이 쓰고 있는 인디언 모자를 자기 손으로 벗기고 칼로 찌르는 것. 인디언 모자는 가면 같은 것이다. 역할 놀이 같은 것. 기택이 서로의 인디언 모자를 벗기고 찌른 것은 속된 말로 계급장 떼어버리고 동등한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내가 널 죽여버린다는 의미다. 고용주, 피고용주라는 역할을 버리고.


새로운 본부장이 부임했다. 그 분은 첫 만남에서 페르소나 이야기를 꺼냈다. 이 단어는 원래 연극 탈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페르소나는 사회 역할이나 배우에 의해 연기되는 등장인물이다. 본부장 이야기의 골자는 이거였다. 


너 페르소나 쓰고 다녀, 그래야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거야

니 위치에서 역할 놀이를 하라는 뜻을 나에게 전했다. 도대체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초면에 저 이야기 부터 꺼내는 걸까?



본부장의 말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번 이백번 지당한 말씀일지 모른다. 사회생활, 조직, 심지어 가족사이에도 정해진 역할이 있다. 역할놀이의 규칙은 권력을 잡은 자가 정한다. 정해진 역할에 충실할때 박사장이 기택 가족에게 주었듯 월급이 떨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평화로워진다. 단,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그런데 기생충에서 박사장은 선을 넘었다. 하나의 제스처를 통해.

박사장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하에서 오랫동안 살던 근세(박명훈)의 냄새를 맡았고, 치를 떠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건 기택이 페르소나를 벗고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존엄을 짓밟는 제스쳐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줄곧 대립관계에 있던 건 근세의 가족과 기택의 가족이다. 기생충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지키려고 이전투구 하며 생존하는 현재의 노동 환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 대립관계가 깨지고 분노의 축은 응당 향해야 했던 박사장에게로 바뀐다. (노동자여. 부르주아에게 짱돌을!) 박사장의 제스쳐는 근세의 냄새를 맡고 자연스레 나온 것이었지만 기택이 격하게 반응 한다. 지하에 사는 근세와 반지하에 사는 기택의 거리는 정서적으로 가까운 것이고, 박사장과 그들과의 거리는 천지차이였던 것이다. 근세에 대한 모욕은 기택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었다.



부자에 대한 빈자들의 분노. 인디언 모자를 벗고 칼을 든 순간, 기택과 박사장은 빈자와 부자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가 된다. 이 클라이맥스 씬 이전에 지하 냄새 이야기가 여러번 나오는데. 기택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상상과 무의식 속에서 기택은 박사장을 여러번 난도질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기택은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었다고 모든 박사장을 찌르지 않는다. 모든 기택들은 박사장을 만날 일이 좀처럼 없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는 다른 기택이나 근세 혹은 자기 자신, 가족에게 향할 것이다. 그리고 가난과 분노는 대물림 될 것이다. 사이 좋은 이웃은 울타리를 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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