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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eL Nov 03. 2023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울의 칼날 속 죽음과 싸워 온 지난 시간들 

요즘 매일 같이 자살기사가 보도되어 나온다. 자살기사의 보도를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씁쓸한 심정이다. 이전에는 댓글을 쓸수도 있었는데 이젠 댓글도 못 쓰게 막아버렸다. 떠난이를 추모할 수도, 같은 생각을 하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할 수 조차 없어졌다.


나는 아동기 우울증을 가지고 지금까지 자라왔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완전히 죽음과 교류하는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살 때 첫 왕따를 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내가 한 실수라곤 옆 친구의 머리끈이 예뻐서 어디서 샀냐고 한 번 만지작 거린 것 뿐인데 다음 날 부터 난 남의 것을 탐내는 도둑이 되어있었다. 그 이후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내내 왕따, 은따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라는 의문이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망가진 사회성은 다시 회복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11살에 첫 자살시도를 했다.

수면제를 많이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약국에 무작정 들어갔다.

"엄마가.. 잠이 안온다는데.. 수면제 좀 주세요.."

약사님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잠이 많이 안 오신대~?" 라는 말과 함께 노란 알약을 5개 정도 주셨다. 그리곤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또 잠이 안온다고 하면 꼭~ 다시 와" 라는 미소와 함께 나를 돌려보냈다. 그 때 그건 비타민이었다. 11살 꼬마가 약국에 와서 엄마 줄 수면제를 산다니..  어른은 이상함을 아셨던 걸까. 이후로 약국엔 가지 않았다. 많이 울고 또 울고 울었더니 어쩐지 괜찮아졌던 것 같다. 


14살 때 적응을 못해서 왕따를 당했다. 그 때 우리 반 속칭 일진은 쾌활하고 멋진 성격이었으나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한 명을 괴롭혀야만 했고 불행하게도 그건 내가 되었다. 학교에 가기 싫어서 아침부터 울기도 하고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도 하고 일부로 눈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당시 우리 집은 '죽어도 학교에서 죽어라.' 같은 다소 극단적인 학교생활을 준수하도록 하여 꼬박꼬박 학교에 등교했다. 성인이 되고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학교 가기 힘들다면.. 보내지 말걸...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미안해.' 하고 사과를 하셨다. 무튼 이 시기에 나는 차가 쌩쌩달리는 차도를 걷거나 별로 안 친한 친구네 집으로 가출을 하거나 겨울에 얼어죽으려 얇은 옷만 입고 눈이 쌓인 바닥에 냅다 누워있거나 하는 기행을 벌였다. 살 목숨이었던 건지 운 좋게도 어떤 사건사고도 없었다. 그 시기를 떠올리면 동생을 찾느라 외투도 안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내 이름을 부르던 오빠의 목소리만 들린다.


28살 때 공황과 우울이 파도처럼 내 인생을 덮쳤다. 14살 때 '20대를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가 운 좋게 28살이 되었지만 '30대를 맞이하지 못할 것 같다.' 는 허탈함과 또 마주했다. 죽을 생각으로 집을 하나씩 치워나갔다. 좋아했던 테이블을 버리려고 내놓자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아주머니가 이런 걸 왜 버리냐며 가져갔고, 전기장판도, 커피포트도 마주친 동네주민들이 다 가져갔다. 그렇게 캐리어 두 개 정도에 다 들어갈 짐만 남겨놓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던 밤이었다.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좋아할 만한 풍경이라 사진만 보낸다고.. 

그렇게 연락을 주고 받다 보니 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친구네 집에서 보낸 약 2주 간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추억과 경험을 쌓았다. 돌아오고 한참이 지나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사실 나 그 때 죽기 전에 너 보러 간 거였어.'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서 더 많은 걸 보여주고 싶었어. 살만한 삶이라고 느끼게.'


이후의 이야기가 아름다웠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우울이 그쳤으면 좋겠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과 달리 28살의 정신건강은 29살 때까지도 영향을 미쳤고 30살이 되던 해는 처음으로 직장에 병가를 냈다. 퇴근해서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자주 울었고 온 몸이 사시 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불안과 우울은 일상을 삼켰다. 집은 쓰레기장이 되었고 외출도 하지 않고 폭식증이 찾아와 계속 먹기만 했다. 스스로 실패자라 낙인찍었고 더 이상 좋은 삶은 내게 없을 것만 같았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이대로 삶이 끝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숨쉬듯 들었고 사람들을 만나도 즐겁지 않고 무슨 일을 해도 의미가 없었다. 병원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30대 중반에 도착했다.

여전히 우울은 내 삶에 잔잔하게 깔려있다.

언제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이라는 생각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달라진 건 이젠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삶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울림이라는 걸 우울과 싸운지 23년만에 깨달았다. 깨달은 계기? 같은 건 웃기게도 없다. 그냥 어느 날 문득. 세상이 아름답다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쨍한 햇볕과 그 볕에 닿은 테이블 위 유리잔이 만들어내는 무지개가 눈에 들어오던 순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이후의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런 게 있었나?' 싶은 순간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눈을 뜨는 일, 오늘 하루 마시는 커피. 창 밖에 내리쬐는 햇살을 보는 것, 바람이 몸에 닿는 느낌, 포근한 이불의 감촉, 잘 맞는 옷, 좋아하는 책, 깨끗하게 닦아내는 책상, 반듯하게 정리된 옷, 또각또각 깍는 손톱 같은 것들..


우울에서 벗어나는데는 쉽지 않았다. 여전히 그 옷을 걸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나아질 수 있었던 건 세상이 새롭게 보이던 어떤 날을 흘려보내지 않고 꽉 붙잡았기 때문인걸까.

'괜찮아지고 싶어' 라는 어떤 주문이 통했던걸까. 

이후로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고 이전에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나씩 경험했다.

그러다 자살사고와 우울에서 벗어나는 네 가지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불안을 이해하는 것.', '오랜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 '인생을 가볍게 바라보는 자세', '소중한 나'. 

아 여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내 과거와 이별하는 일도 포함이다. 마침표 찍고 다음 장으로 과감히 넘기는 일. 다시는 펼쳐보지 않겠다 다짐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 열어볼 수 있지만 다음 챕터를 쓰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 


우울한 사람들은 고정된 패턴을 가지면 도움이 된다.

열심히 살라는 의미는 아니고, 그냥 심플하게..

무조건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자는 것.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 지정되어 있어 꼭 그 날에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 것.

특정 시간에 하는 티비 프로를 기다렸다 보는 것.


요즘 내 목표는 이상하지만 자연사다. 살아 온 만큼의 계절을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수 많은 죽음 앞에서 살아남았고 그래서 살아보기로 했다. 


나도 언제 다시 우울이 찾아올지 모른다. 아동기 우울증을 겪은 사람은 꽤 오랜시간 우울을 지니고 있게 된다던데 나를 상대로 실험을 하는 일. 한 편으로는 가벼운 모험을 떠나는 일이 되려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이 풍요로워진 것도 아니다. 여전히 같은 직장이고 같은 집에 살고 같은 물건을 쓰고 같은 사람을 만난다.

우울증으로 인해 얻은 말 더듬는 버릇, 부족한 사회성, 시도하지 않는 태도 역시 여전하다. 되려 만성 피부염이 생기고 살도 찌고 머리도 많이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이런 것도 삶이니까.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말을 마지막으로.

'삶은 무겁지만 생활은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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