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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 Sep 27. 2019

'시'란 무엇인가

인생의 모든 순간이 시가 될 수 있다? 

오! 나여 오 생명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나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편의 시가 된다는 것!


-월트 휘트만-



시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시에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왜 시가 떠오를까. 그것은 내 안에 한(혹은 느낌)을 언어화하고 싶은 마음일 수 있고, 삶의 순간을 아름답게 창작해 노래화 하거나 미화 하고 싶은 것이거나, 단순히 충동적인 시욕(시를 씀으로 자신을 표현하고픈 욕망)일 수 있겠다. 흐느끼듯한 바이올린 소리를 시작으로 옅게 흘러나오는 다장조 클래식, 그 소리와 함께 펼쳐지는 멋진 자연광경(바다와 산들), 또 하늘을 수놓은 별빛이 없어도, 우리는 언제나 삶을 노래할 수 있다. 꼭 우주를 읊어야 시인가, 하늘과 바람과 별을 그리듯 적어야 시인가, 사랑의 본질을 노래해야 만 시일까. 시는 삶의 본질을 관통해야 하겠지만, 노래의 시작은 작고 소소한 삶의 묘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뭐 이런 거,


설 연휴 첫날 저녁 식탁에서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 '5.16' 이 '혁명'이냐 '군사 쿠데타'냐 란 주체로 펼쳐진 피 튀기는 설전이 '시'가 될 수 있겠고,


어머니와 식사 중 '믿음이냐' '이성이냐' 의 논의가 튀어나왔을 때, 신 존재 증명을 이성적으로 풀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야기(결국엔 대전제는 믿음이겠지만)를 들먹이다, "어둡잖은 지식으로 까불지 말고 감사함으로 믿으며 살어"란 어머니의 말에 반발하며, "제 지식은 어줍잖지 않습니다. 어둡습니다!" 라고 말함으로,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knowledge is power(지식은 힘이다)' 이후 새로운 명제인 'knowledge is dark(지식은 어둡다)' 를 주장하다 허무하게 끝이 나버린 대화를 '시'로 쓸 수 있을 것이다.(시는 '드립'이 될 수 없어도, '드립'은 시가 될 수 있다)




왜 남녀의 사랑만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지하철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연인을 보며 눈꼴시려하는 자신의 감정이 노래가 될 수 있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덧니가 시될 수 있고, 전 여자 친구가 유달리 싫어하던, 웃을 때 살며시 올라가는 입 꼬리, 반골기질을 보여주듯 툭 튀어나온 오른쪽 광대뼈, 

보이지 않지만 피부 껍데기 안쪽에 퍼져있는 수 많은 마음들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로 노래할 수 있다.


그래, 우리는 '삶의 시(노래)'가 필요하다.


'나는 왜 이렇게 살까.' '왜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더 잘 사는 삶은 없을까', 고민하며 부르는 시가 필요하고, 

현실의 노동이 진절머리 날 때 부르는 시가 필요하고,

자신의 상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부르는 시가 필요하고,

'비참의 오늘'을 '설레는 내일'로, '꿈꾸는 삶'으로 승화시키는 노래가 필요하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은 우리가 노래할 가장 큰 명분을 제공해준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더 창의적이고 더 본질적이고 더 겸허할 수 있다. '죽음'이란 신이 만든 최고의 '창조'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 뭐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 다시 서자.


그리곤

내면에 숨어있는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자.

사려 깊게 본연의 삶을 살자(Seize the Day)


삶을 특별하게 만들자(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삶'이 아닌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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