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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 Oct 11. 2018

안녕! 크로아티아

모든 기억을 지워준다는 박물관이 있다면

만사 다 때려 치우고 우리끼리 사업을 하겠다고 뛰어든지 벌써 17개월째. 처음엔 부부가 함께 휴식하는데 집중했다. 회사를 그만둔 것 만으로도 좋아 룰루랄라였다. 말 그대로 놀아재꼈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루 종일 누워서 TV를 보거나, 빈둥거리다 잡히는대로 아무 책이나 집어들고 산책을 나가거나, 온종일 게임을 하거나,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거나 내키는대로 여행을 다녔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휴식이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3개월쯤 지나니 노는 것도 이골이 났는지 좀이 쑤셔서 이제 뭔가 좀 만들어보자 마음 먹었더랬다. 하루 5-6시간이나 일을 했을까? 하고싶은 만큼만 일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는데, 그런 날들을 일과 생활의 밸런스를 맞춰가는 과정이라 여겼다. 나는 충동적인 쇼핑을 잘 하지 않고 딱히 미용이나 패션에도 관심이 없어서 한 번씩 저렴한 피규어나 프라모델을 지르면 그만이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생필품이 떨어졌네.’, ‘스킨, 로션을 다썼네.’하며 무심결에 쓴 생활비가 만만치 않게 나가고 있었다. 정기적인 수입이 없이 산지 1년이 지나니 숨쉬는 것만으로도 돈이 나가는 냉혹한 현실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올해 여름 들어서부터는 마음속으로 긴축재정 기간으로 정하고 왠만해서는 여가생활을 즐기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다. 아파트 관리비 몇 천원을 절약하기 위해서 서베이링크에서 짬짬히 설문조사를 해 포인트를 모으는 와중에 인당 1만원 영화티켓 가격과 외식비가 점점 더 부담스러워졌다. 먹고 싶은 것은 만들어 먹고 꼭 보고 싶은 영화는 좀 참았다가 집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봤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반가운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동생이 일하는 곳에서 무료로 <안녕! 크로아티아> 뮤지컬 티켓 나눔을 한다고. 일정을 확인하고 티켓 3장을 부탁했다.


나 - 엄마, 뮤지컬 볼래?
엄마 - 뮤지컬, 좋지.




간만에 매마른 감성에 양분을 줄 수 있는 날이라 한 껏 기대가 부풀었다. 오랜만에 나들이 가는 날. 흐리긴 했지만 그런대로 날씨가 괜찮았는데 오후들어서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을 더 하고 나가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상하게 일이 잘 되지 않고 신랑이 그린 그림도 유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가려면 준비도 해야 하는데 테스트를 하는 중에 결국 사단이 났다.


나 - “머리 크기가 다 다르네요. 애들이 다 가운데 있으면 좋겠는데 크기가 달라서 그런지 정해 놓은 포지션에 나오지 않고 위치도 다 달라요.”

신랑 - “어떻게 할까요?”

나 - “3번, 7번, 8번, 10번이 유난히 머리가 커요. 그리고 머리카락이 좀.. 부자연스러운데.. 특히 8번이.. 그 걸 왜 열고 있어요?”

신랑 - “이 번호도 이야기 했잖아요.”

나 - “아니 저는 8번을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신랑 - “자기가 이야기한 파일을 모두 열었어요. 앞 번호부터 보려고 3번을 보고 있던거에요. 왜 짜증을 내요?”

나 - “저 짜증 안났는데요. 그냥 이야기 한건데, 왜 짜증내냐고 하니 이제 진짜 짜증이 나네요.”


신랑은 3번 캐릭터 파일을 열고 어디를 어떻게 수정할지 보고 있었고 나는 한창 8번 캐릭터에 대해 의견을 내고 있었다. “8번 캐릭터 파일 열어주세요.” 라고 말하면 될 문제였다. 그런데 나는 “그걸 왜 열고 있어요?”라고 했다. 이 시점부터 우리의 대화는 '평시 대화'가 아니라 '전시 대화'로 양상이 바뀌었다. 어떤 캐릭터가 문제인지, 어떻게 개선하고 싶은지 핵심은 온데간데 없고 서로 상한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기 바빴다. 내가 자신을 비난하는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며 사실은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않아 그런 투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냐고 서운함을 표했다. 나는 그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그 파일을 왜 열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은 거라고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오히려 나를 짜증내는 사람으로 몰아세워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받아쳤다.


신랑 - “‘그걸 왜 하고 있어요?’ 라는 문장은 비난 혹은 의심의 감정으로 오해할 수 있는 문장이에요.”

나 - “그럼, ‘지금 뭐해요?’ 라고 물으면 괜찮아요?”


나는 원래 말투가 이렇게 딱딱한 사람이네, 어릴 때부터 짜증을 내면 호되게 혼나서 매우 조심하는 편이네 어쩌네 하면서 내 말투와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우겼다. 애초에 우리가 왜 이런 대화를 시작했는지는 전혀 상관없이 끝내 내 말투에 대한 이야기만 남았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약속 시간에 쫒겨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 중에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맞다. 상황에 따라 충분히 기분 나쁜 뉘앙스로 느껴질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까 분명 기분이 상하지 않았었다. 짜증나서 몰아세우려고 질문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물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 기분이 어땠든 상대가 내 말투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하면 미안한 마음이 드는게 먼저 아닌가. 내 기분을 오해했다고 갑자기 짜증이 나는 괴상함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졸렬하게 박박 우기던 내 모습이 떠올라 민망하고 창피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쭈뼛쭈뼛 서 있는데 신랑이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자기가 요새 많이 예민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나는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둘 다 외출 전에 화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아직 감정이 다 정돈되지 않은 것 같은 상태로 크게 어색하지 않게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급하게 정리를 한 뒤 부랴부랴 문화생활 겸 기분전환을 하러 대학로로 향했다. 비가 꽤 쏟아져서 큰 우산을 쓰고 길을 나섰다. 신랑 그리고 나와 엄마가 버스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셋이 이동할 때면 항상 이렇게 앉는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누군가가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고 있었다.


‘쎄엑… 그르…..릉…..  컥! 드르렁… 컥!’


엄마 - “킥.. 키키.. 끅..끅.끅...ㅎㅎ히히..힉..”

나 - “그렇게 웃겨?”

엄마 - “응, 너는 안 웃겨?”

나 - “피곤한가보지. 옆에 말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보가 터지는 10대같네.”


입을 틀어막고 터진 웃음을 참는 엄마를 보니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웃음이 터지던 나의 10대가 떠올랐다. 반 친구들이랑 지하철을 타고 소풍을 가는 길이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쉴새 없이 꺄르르 웃는통에 좀 조용히 하라고 곁에 있던 할머니께 한 소리 들었던 기억이 났다. 별 일 아닌데 키득거리는 엄마를 보니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귀엽게도 느껴졌다. 나이가 들면 어린애 같아진다더니 우리 엄마가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아니, 생각해보니 엄마는 원래 해맑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닮았다. 지금은 버스 안에서 가열차게 코를 골고 있는 아저씨를 봐도 웃음이 나지 않는 내가 되었지만.


CJ 아지트 대학로 근처에 있는 일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맛집인데 요리에 비해 밥이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본 음식, 엄마가 직접 담근 토마토 조림이 달지 않고 너무 짜기만 하다는 이야기, 몇 년 전 엄마와 단둘이 했던 하코네 여행, 내 입맛은 왜 이렇게 아저씨 입맛인지, 어릴 때 집착하던 따조 수집 이야기, 어릴 때는 수집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별로 모으고 싶은게 없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인간의 수집욕, 수집욕은 본능이다에서 인류가 어떻게 이렇게 진화하게 되었는지까지 온갖 이야기를 하다 자리를 옮겼다. 언제나처럼 대화의 주제는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튀었고 그런 다채로움이 재밌었다. 문득 나오기 전에 참 쓸데없는 것으로 말다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순간 “엄마, 우리 나오기 전에 싸웠다.”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엄마 - “무슨 일로 싸웠는데? 일 때문에? 싸우는건 다 쓸데 없는 일 때문이지 뭐.”

나 - “응, 맞아.”


여전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서 길가에 위치한 매표소 앞에서 예매한 표를 기다리는 5분의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비오는 것을 좋아했다는 말로 기다리는 나를 위로하는 엄마와 길가에 위치한 매표소 앞에 우산을 들고 선 내가 차에 치일까 염려해 뒤에 선 신랑 덕분에 쳐졌던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뮤지컬 안내지와 표를 받아 들고 좁은 계단을 통해 공연장으로 내려갔다.


안녕! 크로아티아 실연 박물관


<안녕! 크로아티아>는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이다. 두 사람은 모든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크로아티아 두보르브니크로 여행을 떠난다. 이 곳에는 추억이 얽힌 물건을 맡기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실연 박물관'이 있는데 여행 중 크게 다툰 두 사람은 결국 관계 회복 대신 모든 것을 지우기로 결정한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류의 극을 보면 몰입이 잘 되지 않았는데 이 뮤지컬은 진부한 스토리 속에서도 충분히 집중할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주인공들의 감정선과 멀티맨의 익살스러움이 극의 재미를 한껏 살려줘서 좋았다.




불이 꺼진 이후부터 계속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신랑이 노트와 연필을 꺼내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눈은 무대를 향해있었지만 손으로는 사각사각 뭔가를 계속 그리고 있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것일까. 뮤지컬 내용이 취향에 맞지 않는 건가. 집중이 안되고 계속 마음이 쓰였다. 배우들의 연기가 최고조로 치달을 즈음에 잠시 멈추었을 뿐, 이 사람은 계속 캐릭터의 얼굴, 머리표현, 몸뚱이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펜과 노트가 있으면 슥슥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사람이긴 하지만 뮤지컬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다니 마음이 썩 불편했다. 신랑은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로 15년 이상 일을 하며 코딩계에 베테랑이 되었기에 프로 그림쟁이들과는 당연히 결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뱁새가 황새 쫒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우리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이 사랑 뮤지컬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 할 시간을 빼앗아 방해가 된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 또 온갖 걱정과 오지랖 병이 도졌다. 공돌이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게 된 상황도 상황이지만 괜히 나 때문에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해 자격지심이 생긴게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재밌으면서 재밌지 않은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불이 켜졌다. 관객과의 시간이고 뭐고 우리는 급히 자리를 나섰다. 엄마는 빨리 가자고 했다. 엄마가 혹시 이 사람이 그림 그리는 것을 봤을까? 그래서 빨리 집에 가자고 하는건가? 언제나처럼 관람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주인공들의 심리상태, 배우의 노래실력, 무대 조명에 대해, 그러다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에 대해 곱씹으며 대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갑자기 정말 쓸데없는 것으로 우리가 싸운것인지 내게 다시 확인하던 엄마의 눈은 신랑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불편한 자세로 두 눈을 꼭 감고 잠든 신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몰래 그림 그리느라 피곤했나 보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외부 자극과 심적 자극으로 뇌가 시끄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다짐했던 것은 꼭 집에 가서 왜 뮤지컬에 집중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는지 따져 묻겠다는 것이었다.


엄마 - 이제는 모으고 싶은게 없어?
나 - 응, 별로 그렇게 모으고 싶은게 없는데?
엄마 - 이제는 돈을 모으고 싶나?
나 - 어? 그렇네.. 이제는 돈을 모으고 싶네.
엄마 - 니 나이가 딱 그럴 나이다. 나도 그 때 정말 돈 생각 많이 했는데..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오늘 왜 그렇게 억지를 부렸는지 알 것 같았다. 돈 때문이구나. 공짜표를 구해서 뮤지컬을 보러가게 되었다고 신났던 나, 비오는 날 외출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추적추적 비가 오는데도 표가 아까워서 굳이 집을 나선 내가 측은해서 짜증이 났던 거구나. 프로그래머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심통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마음을 잘 추스리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신랑의 한 마디에 무너져 괜히 심술을 부렸던거다. 크로아티아에 ‘실연 박물관'이 아니라 ‘망각 박물관'이나 ‘상실 박물관'이 있다면 내가 했던 못된 말들을 다 지울 수 있을텐데. 굳이 뭔가를 지운다면 가장 심각한 일을 골라내려 고심하긴 하겠지만, 이런 사소한 실수들을 싹 지울 수 있다면 더 행복할까? 내가 어떤 물건을 박물관에 두고 나오면 나만 기억을 지우게 되는거겠지? 잘못한 사람이 기억을 지우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면 당한 사람은 얼마나 속이 터질까. 잊고싶은 기억이 얽힌 물건을 골라야 한다면 뭘 골라야 할까. 우리의 다툼을 잊으려면? 컴퓨터? 핸드폰? 안돼 안돼. 이게 없으면 일을 할 수 없고, 일을 하지 못하면 돈을 벌 수 없잖아. 무슨 박물관이고 뭐고 그냥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거다. 민망한 내 억지스러움과 고집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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