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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화 Sep 16. 2023

진료실 소회, 씁쓸한 감정.

30대 여성 A씨는 평소 산부인과 진료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성 경험도 없었고, 산부인과 방문하면 주변에서 뭔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으며 딱히 질염 증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월경량이 많아지고 월경통이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내심 좀 불안했지만, 그럭 저럭 진통제를 먹었더니 통증은 어느 정도 버틸만 했다. 그러던 중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겨워져서 근처 동네 내과에서 전반적인 피 검사를 시행했고 그 결과 빈혈 진단을 받았다. 특별한 기저 질환이 없었던 터라 매우 놀랬던 A씨에게 내과 전문의는 조심스럽게 산부인과 진료를 보기를 권했다.  


  뜬금 없이 산부인과 진료라니. 두려움과 황당한 마음을 갖고 산부인과 문턱을 넘은 A씨는 내과 진료를 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게다가 금번 생리부터는 질과 항문 쪽의 통증까지 심해져서 앉아 있을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사무직인 그녀에게는 너무도 고된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외음부 시진 및 골반 초음파를 보자고 권유했다.


  성 경험이 없는 상태라 골반 내진은 할 수 없었지만 질과 항문 쪽 통증이 심해서 외음부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찰대 위에 올라간 그녀의 외음부를 본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 성 경험이 단 한번도 없어서 질의 입구가 거의 좁고 질막으로 막혀 있다시피 한 상태여야 하는데 아기 머리통 만한 종양이 질 밖으로 튀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뒤 이어 시행한 그녀의 골반 초음파 소견은 대략 15cm 이상의 ‘거대 골반 종양’. 30대의 A씨에게서는 상상도 못한 상황이었다.   


  서둘러 대학 병원에 보내야 했다. 급하게 anemia work up만 하고 Severance 종양 파트로 진료 의뢰를 드렸다. uterus preservation이 너무 필요한 상황이나 너무 크고 이상하게 자라버린 tumor를 보니 STUMP나 Sarcoma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발 endometrium이 intact한 leiomyoma이기를 바라면서 환자에게는 MRI 찍을 수 있고 추후 교수님이 하자고 하는 검사는 군말없이 다 따르라고 엄청 수술 잘 하시는 교수님이시고 최선을 다하시는 분들이시고 최고의 스승님들이시니 치료 잘 받으시라고 바로 다음 날 외래를 볼 수 있게 총알 같이 외래를 잡아 드렸다(협력 병원의 힘... 너무 감사할 뿐). 

  외래를 본 후 걱정이 되서 A씨에게 전화를 했다. 어찌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환자는 괜찮은지 걱정 되기도 해서. 오늘 저녁에 MRI를 찍기로 했단다. 그리고 1주일 뒤에 외래가 잡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조금 시큰둥 했다. 


"왜 MRI 찍고 1주일이나 뒤에 외래가 잡혔는지 모르겠어요."


"A님, 1주일 뒤에 외래가 잡히는 건 당연한 거고, 빨리 잡힌 거에요. 영상 의학과 선생님이 A님 영상만 판독을 하는게 아니에요. 엄청 많은 환자분들의 영상을 다 판독하고 확정해야 해요. 게다가 산부인과 교수님도 일일이 다 영상을 확인하고 고민하실 거구요 수술에 대해서도 어찌 하실지 고민이 많으실 거에요. A님이 젊고 아직 임신도 하셔야 하는 상황이라 그래요. 의사들이 그렇게 단순하게 환자를 보지 않아요. 그냥 무조건 이런 상황에는 믿고 기다리세요. 지금까지 30년 간 산부인과 단 한번도 안오셔놓고, 1주일 기다리는 걸로 투덜 거리시면 안되요."


  A씨는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알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가슴 졸이며 그녀의 MRI 판독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부디 단순 평활 근종이기를 너무도 바란다. 악성 종양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 바쁜 대학 병원에 단 하루 만에 외래를 잡아 주었는데도 투덜 거리는 환자들이라니... 참으로 인간이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해는 되지만 서글프다. 


  삶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삶은 순간 순간에는 비극적 사건으로 채워져 있지만, 전체를 보면 결국 하나의 희극에 불과하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보느냐에 따라 삶은 비극이 되기도 하고 희극이 되기도 한다. 환자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도, 바로 인간에게 염증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일상이겠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 알고 보면 그게 다이다. 허나 그걸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평소에는 방만하게 대하다가도 의사들을 만나면 자신의 책임을 의사들에게 투사하려 든다. 그들이 이해되다가도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면 나 자신도 힘겨워짐을 느낀다. 그녀가 평소에 성경험이 없어도 산부인과에 규칙적으로 좀 왔다면 과연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산부인과 자체에 대한 허들이 많이 낮아졌다고 생각했는데도 2023년 서울에서 여전히 이런 케이스가 생기기도 하는구나, 최대한 빨리 국내 최고의 의사를 연결해줬는데 1주일이나 기다리게 한다고 투덜댈 수도 있구나... 


  아무튼, 그녀의 마지막이 해피 엔딩이길 간절히 바래본다. 그래도 의사는 언제나 환자의 편이니깐. 작은 진료실에서 하염없이 환자를 기다리며, 그들의 건강만이 언제나 나의 목표가 되는 것은 변함 없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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