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피레네가 제일 힘든 구간일 줄 알았는데

by 양송이타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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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피레네를 넘고 너무 피곤해서 22시가 되기도 전에 일찍 잠들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12시에 한 번, 3시에 한 번, 그리고 4시에 한 번 잠이 깼는데, 설렘 반 긴장 반 때문에 도저히 잠이 안 와 4시 30분에 완전히 눈을 뜨게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침낭을 개고 배낭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문 앞에서 20여 분 정도 서성이는데 침실에서 한, 두 명씩 내려오는 게 보인다. 호스피탈레로가 출입문을 열어주었지만 깜깜한 새벽이라 선뜻 먼저 출발하는 사람이 없었고, 나 역시 어두운 숲길을 혼자 헤쳐 갈 자신이 없었기에 알베르게 입구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계속 망설이다 출발이 늦어지게 되면 오늘도 땡볕을 지나야 할 것 같아 5시에 문을 열고 나와 앞장을 섰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 다른 건물에서 나온 순례자 몇몇이 이미 저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남은 거리 790km를 표시해 둔 화살표가 보인다.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거리가 이만큼이나 남았다.


오늘은 수비리(Zubiri)까지 가기로 했다. 어제 살아생전 처음 높은 산을 올랐으니 오늘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생장에서 나눠준 고도표에 나와있는 라라소냐(Larrasoana) 대신 수비리까지 약 20km 정도 걸으려 한다. 어제보단 경사가 심하지 않고 거리도 짧으니 동키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배낭을 메고 천천히 가보기로 했다.


3.jpg 이른 새벽, 론세스바예스


론세스바예스에서 나와 제일 먼저 들어가게 되는 숲은 빛 하나 없이 어두운 길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곳이었다. 새소리만 들려오는 새벽녘 숲길이었는데, 고즈넉하다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무가 울창해 햇빛이 들지 않는 깜깜한 숲길을 혼자 걷게 되다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이러다 괴한을 만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서움이 느껴질 때면 피레네에서처럼 어김없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러다 저 멀리 순례자가 보이면 어두운 숲길을 밝혀주는 랜턴처럼 느껴져 그의 실루엣을 놓치기 싫어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속도에 맞지 않는 걸음은 나를 쉽게 지치게 했다. 결국 앞사람을 따라가는 걸 포기하고 내 속도를 찾기로 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땀이 났다. 금세 더워져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허리에 둘렀다. 어제 피레네에서 느꼈던 더위가 슬슬 생각나서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저 멀리 빛이 살짝 스치는가 싶더니 어두운 숲의 끝이 보였고, 곧이어 작은 마을이 나왔다. 론세스바예스를 지나 처음 보이는 이 마을의 이름은 부르게테(Burguete). 피레네를 넘어 론세스바예스에서 하루를 보낸 순례자들은 다음날 아침이 마을에서 아침을 먹게 된다. 하지만 오늘은 깜깜한 새벽에 론세스바예스를 출발했기 때문에 열려있는 가게를 도통 찾을 수가 없었고, 어쩔 수없이 다음 마을로 가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마을을 지나가기 직전에 내 뒤에서 걸어오던 외국인이랑 걸음 속도가 점점 비슷해졌다. 독일에서 온 그는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은 다리도 짧고 체구도 작은 내가 낑낑거리며 느리게 걷는 모습과 비교되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느린 내 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주는 그가 정말 멋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도 그의 걸음 속도에 맞춰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그에게 차마 같이 쉬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계속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를 먼저 보내기 위해 일부러 한참을 느리게 걸었다. 그렇게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떠났다.


그를 보내고 혼자 몇 십 분을 걸었을까. 또다시 숲처럼 보이는 길이 나왔고, 약간의 오르막을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론세스바예스에서부터 걸어오기를 벌써 몇 시간째. 일찍 출발한 나에 비해 걸음이 빠른 다른 사람들은 이미 나를 휙휙 지나쳐갔고, 또다시 내 체력은 방전이 되었다. 쉬고 싶을 때 아무 곳에서나 앉아 쉬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휴대용 방석을 꺼내 길가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이런 나를 보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미국인처럼 보이는 아버지와 딸이 말했던 Are you okay?

유럽인처럼 보이는 부부의 Does anything I can help you?

그 외에도 수 명이 지나가면서 했던 인사와 걱정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거나 미소를 짓는 정도지만, 몇몇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무슨 일이 있냐고 계속 물어봐 주었다. 괜찮다고 웃으며 대답하기도 몇 차례,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내가 괜히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다시 일어나서 걷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걷고, 또 걷다 보니 드디어 마을이 나왔다. 이 마을에서는 첫 번째 들린 마을에서 먹지 못한 아침과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 문을 연 카페는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다음 마을로 이동해야 했다. 마을을 나와 더위와 피로를 잠시 식힐 수 있는 물가를 지나가는데, 어제 피레네에서 봤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보다 늦게 출발했으면서도 벌써 나를 따라잡은 것 같다. 새삼스레 내 느린 걸음이 야속했고 그들의 체력과 속도가 부러웠다. 그래도 오늘은 어제에 비해서 약간 적응이 됐는지, 내리막길이나 더위는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오히려 무거운 배낭이 나를 짓눌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먼 타국까지 나와서 배낭을 메고 낑낑 걸어가는 걸까하는 생각에 너무 슬프기도, 신나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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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혼자 걷고 있는데 어느새 내 주변에 외국인 친구 두 명이 걷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빠르게 걸어와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이 친구들은 미국에서 온 리처드와 폴란드에서 온 이름 모를 친구였다. 이 쾌활한 친구들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나도 잠시나마 힘듦을 잊을 수 있었다. 리처드는 자기가 LA에서 온 캘리포니아 사람이고, 히스패닉계라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강남스타일을 부르면서 한국을 알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모습이 재밌었다. 캘리포니아는 오렌지가 유명해서 캘리포니아하면 다들 오렌지로 알고 있다고 박장대소하던 밝은 모습에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비교적 내가 알아듣기 쉬운 미국식 영어와 친구들의 시원시원한 분위기 덕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즐거웠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처드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유명인사였다. 미국인, 유럽인 할 것 없이 자기랑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눈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억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모두들 리처드를 '밝고 유쾌한, 하지만 정신없이 시끄러운 친구'라고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폴란드 친구는 이후에도 종종 몇 번씩 마주쳤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보게 되었는데 몇 주 뒤까지 계속 마주쳐서 반가웠다.


그들과 함께 걸으며 즐거움을 누린지 벌써 몇 십 분이 지났을까. 어느새 다음 마을인 에스피날(Espinal)에 도착해 있었다. 아침을 먹고 출발한 그들을 먼저 보내고 나는 이 마을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카페에 들러 아침을 주문하기 전에, 카페 앞 테라스에 앉아 있던 외국인 부부에게 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어보고 그들과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을 받아들고 테라스로 나가 합석을 하니 아까 숲에서 잠깐 마주쳤던 한국인 아주머니도 오셨다. 콜롬비아에서 온 이 부부는 프란시스코와 나탈리아라고 한다. 부부 교사로 각각 영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친다. 한국에서 꼭 한 번 지내보고 싶었고, 교사 동료들 중에서도 한국에서 외국인 교사로 지내고 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럽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 나와 아주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특히 생활비와 단점에 대해 많이 물어보았다. 월급을 얼마나 받으면 풍족하게 살 수 있냐는 질문에 나랑 아주머니는 두 명이 서울에서 산다고 하면 월 300도 빠듯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돈은 많으면 많을 수록 편할 테지만 한국은, 특히 서울은 유난히 더 심한 것 같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환경이나 날씨는 어떻냐는 질문에는, 서울의 봄은 중국에서 날아온 미세먼지와 황사가 너무 심하다고 했다. 우리가 말한 단점들을 듣고 난 후에 그들의 생각이 바뀌진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은 건 변치 않다는 그들의 고마운 말과 함께 우리는 식사를 마쳤고, 다시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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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는 다같이 쑥스러워했다.


아침을 먹고 걸으니 훨씬 기분이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길을 떠나는 발걸음이 아까보다 가벼워졌다. 같이 식사를 했던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길을 걸었다. 공동묘지 앞을 지났고, 달팽이들을 피해서 걸었다. 솔방울이 깔린 소나무 길도 지나는데 앞선 순례자들이 만들어 놓은 솔방울 화살표가 있었다. 솔방울들이 바람에 날아가는데도 여러 순례자들이 주워놓은 솔방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렇게 큰 화살표가 된 모양이다. 나도 화살표 끝에 솔방울 하나 살짝 얹어두고 뿌듯하게 걸어갔다.


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난 즐거움도 잠시. 열심히 걸어가는데 갑자기 몸에 쌓인 피로가 한 번에 오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어제랑 다르게 동키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배낭을 메고 걸어서 더 힘든 느낌이다. 숲길과 작은 마을들, 그리고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지나, 12시쯤 더위에 지쳤을 무렵이었다. 내리막길에 무릎이 아팠던 데다가 발에는 계속해서 물집이 잡혔고 배낭 무게 때문에 어깨가 아파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릎이 아플 때마다 조금씩 쉬면서 겨우겨우 한 걸음씩 뗐고, 발이 아프면 양말을 벗어 발을 말렸다. 너무 더워서 겉옷과 팔에 물을 뿌렸고, 너무 지치면 아무 곳이나 앉아서 쉬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다 보니 이제는 조금씩 쉬었다가는 것도 너무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이 계속 걷게 되었고 발과 무릎, 다리, 어깨는 모두 이미 한계를 넘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왜 여기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뭘 생각하고 있지. 이 길이 끝나면 나는 어떤 것이든 답을 찾을 수 있는 걸까. 혹시 답을 못 찾는 건 아닐까. 아니면 답을 못 찾는 것조차 답인 걸까.


그때 문득 깨달았다. 재수, 삼수를 할 때는 정신적인 한계에 몰렸었고 지금은 육체의 한계에 몰렸는데, 이렇게 한계에 몰릴 때 비로소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 내가 원하는 것,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 결국 내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랐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더 이상 내 발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되었고, 무릎은 연골이 나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깨는 하루 이틀 마사지로는 해결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더위야 이미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 씻어내지 않으면 냄새나는 옷과 몸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에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엔 과거에 내게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부터 지금 현재 내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하나씩 점을 이어가면서 수비리로 향하는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수비리(Zubiri)에 도착했다. 이미 시간은 1시가 다 되어 갔고, 점점 뜨거워지는 햇빛에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 중 대다수는 생장에서 준 고도표대로 라라소냐까지 걷는다고 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는 말과 함께 그들을 보냈고, 나는 결국 수비리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아마 팜플로냐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지 않을까.


14_수비리.jpg 작은 마을인 수비리(Zubiri)


알베르게에 도착해 씻고 짐을 정리하니 한, 두 명씩 알베르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론세스바예스의 저녁식사를 함께 한 미셸과 엘레나 아주머니를 또 만났고, 한국인 아주머니와 딸이 해주는 닭죽도 먹었다. 알베르게 부엌에서 글을 쓰던 미국인 잭 아저씨는 1990년대에 한국에서 군인 생활을 했었는데, 대구, 부산, 포항을 다녔다고 한다. 그 후로 1~20년 동안 한국에 간 적은 없었지만 인터넷을 보니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고 하셨다. 말투나 체격, 성품, 단어 선택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멋진 눈빛과 유머러스함을 함께 갖췄다는 말은 이 사람을 위해 있는 말인 것 같다. 길에서 자주 마주쳤던 헬모트는 우연히 내 옆 침대를 쓰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그는 큰 키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 쪼그려 앉아 눈을 맞춰주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말하고, 듣고, 이야기를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웠다. 아침부터 여러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를 해 왔지만, 영어를 못 하는 외국인들은 나와의 대화를 피하려고 해서 소통이 쉽지 않았다. 영어를 잘 하는 외국인들은 대화 속도가 너무 빠른데다 내 영어가 유창하지 않음에 답답했는지 금방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나마 같은 아시아권인 대만 친구들은 제2언어인만큼 서로서로 배려해 주면서 천천히 말하고 소통하려 노력했던 편이었다. 기분 좋은 헬모트와의 만남에 그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마을을 조금 더 둘러보았다.


15.jpg 국도가 마을 옆을 지나고 있었다.


수비리는 내가 지나온 마을들만큼이나 작은 마을이다. 첫째 날 힘들었던 몸, 그리고 둘째 날 불안했던 마음을 쉬게 해주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작은 강이 맑게 흐르는 예쁜 마을 수비리. 이 마을은 하얀색 벽에 갈색 벽돌 장식이 많은 편이었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 걸어야 할 길을 미리 눈도장 찍어두고 알베르게 근처로 돌아왔다. 마을 입구에 흐르는 강에서 발을 담그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몇몇은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줬다.


헬모트와 저녁을 먹으러 가니 만석이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아까 수비리로 오는 길에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아 쉬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 'Are you okay?'라고 물어보던 미국인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들은 위스콘신에서 온 메이슨과 루비로, 아버지와 딸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루비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기념으로 함께 순례길에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딸이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걸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방침답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과 1시간 넘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소통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위해 되도록 쉬운 단어와 문장을 골라 이야기했고, 조금이라도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혹시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단어는 아닌지 신경 써주었다. 한참을 웃고 떠들었던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루비는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다른 순례자들에게 쉽게 말을 붙이지 못 했는데, 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환히 웃는 모습이 하루 종일 머리에 맴돌았다고 한다. 가방에 넣어 둔 방석을 검처럼 뽑아 바닥에 펼친 후 앉는 내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헬모트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번이 두 번째 까미노이며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두 번째 까미노는 어떤 마음으로 걷는 걸까. 내가 걸은 똑같은 길을 다시 걷는 건, 어떤 기분인 걸까.


16.jpg (왼쪽부터) 헬모트, 루비, 메이슨, 나


돈을 아껴야 한다던 헬모트가 내 저녁을 사주었다. 즐거운 저녁식사에 대한 보답이란다. 다음에 만나면 꼭 내가 사주기로 했다.


내일은 순례길에 있는 몇 안되는 대도시들 중 첫 번째 대도시인 팜플로냐에 갈 예정이다. 산길과 숲길을 지나 점점 자연인에 가까워지는 내게 대도시라니. 스페인의 대도시는 어떤 느낌, 어떤 색감을 가진 곳일까 생각하며 약간은 들뜬 마음을 안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