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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빛빛빛 May 11. 2018

경계를 지운다는 것

과학 소설 혹은 영화가 새로운 상상력을 통하여 소수인종, 성적소수자, 여성 등을 구분하는 기존 사회의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와 현재의 성에 관한 실험적인 대안이 담긴 무대를 묘사할 수 있는 장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간의 과학 작품에서 이러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소설과 영화들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독자들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작품에 관해 잔뜩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SF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성 이미지는 흔히 로봇 혹은 외계종족과의 전투에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여전사 캐릭터가 등장한다하더라도 이는 남성의 시각적 유희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그려지는 듯한 인상을 들게 한다. 제인 폰다가 주연을 맡은 영화 『바바렐라 Barbarella』의 바바렐라가 그러한 캐릭터 중 하나다.  


바바렐라 Barbarella, 로저 바딤, 1968


영화의 도입 부분부터 우주복을 하나씩 벗으며 몸매를 드러내는 지구 첩보원, 바바렐라의 누드쇼는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장면이다. 그녀의 임무는 실종된 과학자 듀란 듀란을 찾아내는 일이다. 결말에서 바바렐라는 이 미친 과학자 듀란의 우주 정복의 음모를 막는다. 그것도 그녀의 오로지 남성을 녹이는 성적 매력만으로 지구와 우주를 구한다. 당시 지구인들은 오염을 두려워하여 육체적 접촉을 통한 섹스행위 대신 약을 먹고 손을 맞대며 섹스를 가상으로 상상하는 것에 익숙하다. 바바렐라는 과학자를 찾으면서 여러 위험에 처하고 그녀를 구해주는 남성들에게 보답으로 이같은 섹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당시 과학을 소재로 한 독자가 주로 남성임을 염두해두고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에 미치는 가학적 이미지들, 강한 힘과 폭력, 여성에 대한 성적 충동이 함께 버무려져 독자들의 테이블에 올려졌다.하지만 이러한 시도의 반대편에서는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하여 가상의 공간에서 사회의 성적 위계질서를 뒤집어보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작가들에 의해서다.  


1970년대 등장한 리사 터틀Lisa Tuttle, 조안나 러스Joanna Russ,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James Tiptree, Jr.) 등 여성 SF 작가들은 고전적 소재였던 시간여행, 우주, 사이버 펑크 등에서 벗어나 새롭고 실험적인 주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기존 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에 대한 균열을 내고, 성차를 규정짓는 방식에 메스를 가한다. 조안나 러스가 지적하듯이, “SF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남녀 역할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뒤엎은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사회구조 속에 미묘하게 녹아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문제를 구호와 선언을 뛰어넘어 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제시했다.  


이들은 남녀 이외의 성별이 존재하는 사회, 생물학적 성징이 없던 인간이 특별한 계기로 성이 분화되는 사회, 한 가지 성만 남은 사회에 다른 성이 나타난다거나, 성전환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사회 등을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 사회의 차별적인 성역할 분담이나 그 속에 숨어있는 가치관이 실제로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났다. 페미니즘 SF는 성별 구획에 갇혀 살아가던 남성들의 상상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다.  


리사 터틀의 『남자의 여자The Wound』나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When It Changed』, 존 발리의 『레오와 클레오Options』,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Houston, Houston, Do you Read?』 등은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정해지지 않았던 성별이 환경에 따라 결정 된다든가, 성전환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세계, 남녀 두 성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성별이 존재한다거나, 또는 여성만 남은 세계에 남성들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 등을 다루며 기존의 젠더 구조를 흐트러뜨린다.

  

특히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출간 당시 엄청난 논쟁에 휘말렸던 작품이다. 최소 8백 년 동안 남성이라고는 없었던 ‘와일어웨이Whileaway’, 천년 후의 지구를 무대로 한다. 그 세계에 "그들이 돌아왔어요! 진짜 지구 남자들이요!"라는 외침과 함께 남성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소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면,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이야기하던 ‘여성들의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라’는 주장들로 가득하다.  


사이버펑크 최고의 소설로 평가되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의 스페이스 카우보이가 말하듯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가장 특권적인 위치에 가상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고 오명의 맨 아랫자리에는 육체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바로 이러한 신세계의 탈육체성이 새로운 페미니즘적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이보그는 더 이상 육체가 문제되지 않는, ‘인간/기계, 인간/동물, 물질/비물질 등등의 경계의 일탈이자 경계의 융합’이며 이 성차 없는 새로운 유토피아에서 타자를 억압하지 않는 역사가 새롭게 쓰여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 예찬론과는 달리 현재 우리가 일상적인 것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는 그리 성평등한 공간으로 보이지 않으며, 사이보그도 이미 ‘남성형’을 부여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늘날의 사이버스페이스는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탈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더 강력한 규범원리를 세워 권력을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게 아찔한 공간이란 두 가능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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