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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썬즈 Dec 10. 2021

그림을 못 그려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되기 전, 어깨 한쪽에 화구통을 매고 학교를 나서던 옆반 친구가 자주 눈에 들어왔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그림을 그리던 그 아이를 보던 그때부터 어쩌면 디자인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 했던지도 모른다. 그림이라곤 동그란 얼굴과 비율도 맞지 않는 팔다리 정도만 그릴 줄 알았던 내가 벌써 9년째 디자인을 하고 있다니, 내가 봐도 놀라운 일이다.









그림이나 데생 같은 건 거의 할 줄 몰랐지만, 다행히도 내겐 레이아웃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보아오던 잡지를 통해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그런 감각을 길러왔던 게 아닐까 싶다. 글자를 어떻게 배치해야 아름다운지, 이런 여백이 왜 필요한 건지, 컬러는 왜 이런 걸 썼는지. 이론적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어도 좋은 디자인을 보다 보니 생겨난 나만의 감각이랄까.







디자인의 세계에 발을 들이다




본격적으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걸 해본건 대학생 때다. 디자인이라고 말하기엔 좀 거창할 수도 있지만 학생회 홍보부장을 하면서부터 포토샵으로 여러 가지 인쇄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때 당시 손으로 쓰던 대자보에서 벗어나, 웹자보라고 해서 포토샵으로 뚝딱뚝딱 포스터 형식의 결과물을 제작했다.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업로드하기도 하고 실제로 출력해 건물 내 게시판에 붙이기도 했다. 내가 학교 다니던 십여 년 전만 해도 손으로 대자보 쓰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나로 인해 그 이후 학내 홍보물 형태에 큰 변화가 찾아왔었다.




디자인학과 학생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작업물을 실제로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 내겐 큰 행운이었다. 축제 때 행사 팸플릿이라던가, 각종 현수막, 행사 단체티 등등을 내가 직접 작업하고 결과물을 손에 쥐어볼 수 있어서 실무에 가까운 지식들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이미지 한 장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영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등록금 문제를 제기하던 영상이었는데, 움직이는 화면과 분위기에 맞는 음악, 그리고 마음에 울리는 자막까지 이 셋의 콜라보는 사람을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 영상이 가져다주는 힘에 매료되어 독학으로 영상제작의 길에 푹 빠지게 되었다. 처음 접한 프로그램은 대표적인 편집 프로그램, 프리미어. 지금은 유튜브다 뭐다 해서 많이 알려진 프로그램이지만 예전엔 튜토리얼도 지금만큼 많지도 않고 온라인 클래스 또한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 혼자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터득해야만 했었다.




모션그래픽과의 만남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프리미어와 동거 동락하고 지냈고, 여러 가지 정보를 찾다 보니 모션그래픽이라는 분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움직이는 그래픽이다. 촬영된 영상이나 사진만으로 영상을 전달하기에 아쉬움을 느꼈던 내게 모션그래픽은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한 줄기 같았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에 움직임을 줌으로써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의 대학 전공은 생명공학이었으나, 전공을 버리고 이 분야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날 사로잡았다. 부모님의 많은 우려를 뒤로 한채 모션그래픽을 나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독학을 하면서 포트폴리오라는 걸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불안한 마음에 국비 학원에도 잠시 발을 들여보긴 했지만 생각만큼 수확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디자인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모션그래픽 스킬보다는 그런 기본기를 다지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디자인 코너의 책들도 섭렵하려 애썼고,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면 당장 달려가기에 바빴다. 그리고 잘된 디자인이 보이면 항상 스크랩하는 습관도 길렀다. 얼마 후에 나의 노력이 통했는지 운 좋게도 한 영상회사에 모션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업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모션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하지만 내가 가진 디자인 감각을 잘 살려 일을 하고 있다.







그림을 못 그려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냐고? 물론이다. 그림을 잘 그리면 더욱 좋겠지만 설사 잘 그리지 못하더라도 다른 감각을 더 잘 키우면 되는 일. 나 같은 케이스도 있으니, 모션그래픽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이여 좀 더 용기를 내어 돌진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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