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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혜 Jul 02. 2020

한라산엔 왜 간다고 해가지고.

혼자 백록담 보고 온 이야기


왜 한라산에 홀렸는지는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나 한라산 갈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혼자 가기는 무서워 같이 갈 사람들을 구했지만 실패. 그렇게 몇 년 동안 말만 하다 왜 가려고 했던지는 모두 잊고 일단 가기로 했다. 무슨 일을 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


처음 한라산을 만난 건 고1 수학여행이다. 첫 타자로 오르기 시작한 우리는 힘들다며 풀숲에 숨어서 다른 반이 모두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이제는 더 안 오겠지 하고 낄낄 대며 내려가려는데 들린 소리. "야야 너네 뭐야!" 선도부 선생님들이 가장 밑에서 아주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고, 우리는 걸렸다.

그렇게 올라간 한라산이지만 막상 오르니 신나서, 대피소 통제 5분 정도 남기고 백록담까지 다녀왔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 구름이 자욱해 꿈속을 걷는 듯했던 기억이 있다. 중간중간 뛰어다닌 기억도 남아있다. 그때는 내가 열일곱이었는데, 열일곱이었단 것도 같이 기억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한라산엔 간다 해가지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 한라산을 위한 제주 비행기 티켓을 샀다.


관음사 코스로 가는 길.
시작하자마자 뒤따라오던 군인 무리에게 비켜서느라 한참을 서있었다.


시작은 호기로웠다. 이왕 가는 것,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 다른 쪽인 성판악으로 내려오기로 정했다. 사라오름에서 강아솔의 ‘사라오름’을 듣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어서, 내려오는 성판악 길에 사라오름에 들릴 생각도 했다. 올라가서 알게 되었지. 사라오름은 무슨. 나를 과대평가해도 한참 과대평가했다.  


바쁜 일상에 밀려 꼼꼼하게 알아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긴 산행이니 먹을 것과 물을 챙기고, 정상에서 추울 수 있으니 바람막이도 챙겼다. 평소에 산을 갈 때 챙기지 않던 초콜릿, 견과류, 계란, 보온병 물, 컵라면까지 챙겼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등산화 하나 있는 나는 긴 산행을 위해 아빠의 등산 가방과 엄마의 등산 스틱을 빌려 떠났다. 아빠, 엄마가 함께하는 것 같다며 혼자 하는 산행을 괜히 위로한다. 


천천히 계속 오르는 스타일이라 내 페이스를 지키며 산을 올랐다. 다행히 평소에 등산을 하며 내 페이스를 알아두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나의 한라산 동반자 같은 존재였던 등산 스탁과 배낭


같은 구간, 같은 시간대에 출발하면, 같은 사람들을 계속 마주친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기 속도에 맞춰 산을 오른다. 딸과 함께 온 아저씨, 친구들끼리 함께 온 아주머니들, 대학 친구들과 온 학생들. 다들 자기 속도로 산을 오른다. 

관음사 코스 끝 가장 어려운 구간. 처음에는 무표정으로 말 한 마디 없던 사람과도 눈이 마주치니 웃음이 터진다. 서로의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응원하는 마음도 들고. 

 

산을 한참 오르다 중간쯤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한라산엔 왜 온다고 했을까.'

'산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는데 산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좋아한다는 게 뭘까……. 이건 아니지 않나.'

'끝은 있겠지. 그 끝은 언제 올까.'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며 산에 온다고 한 걸까.'

...


그러다 마주한 풍경들.

그렇지. 이래서 산에 오지.
정상!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짐이 불필요한 것으로 밝혀지며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산을 오를 때 뭘 많이 먹는 스타일이 아닌데, 후기를 읽고 이것저것 너무 챙겨갔다. 먹을 것을 줄이고, 간단한 요깃거리와 물!!!을 챙길 걸 하는 아쉬움.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500리터 두 병만 가지고 올랐는데 나의 교만이었다. 아끼고 아껴 마셨지만 물을 마셔야만 괜찮아져서 백록담에 도착하기 전에 챙겨 온 모든 물을 다 마셨다. (다음에 다시 오른다면 꼭 2리터 챙겨갈 거다.)

산행을 모두 마치고 내려와 바로 생수를 사서 원샷. 가장 값진 3000원이었다.


내려오는 성판악 길은 너무 길고 길어서, 지겹기까지 했다.

혼자 고깃집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는 사람이라 웬만한 건 혼자 잘하는데, 성판악 길은 지겨워서 거의 달리다시피 뛰어 내려왔다. 무릎이 나갈까 봐 스틱에 많이 의지하며, 달렸다. 

마지막에 출구를 보고 얼마나 기뻤던지. 그래도 돌아보니 혼자였어서 내려오는 길과 그 풍경을 양껏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또 갈 거냐는 질문에 하산한 당일에는 “음. 당분간은 산에 안 가도 괜찮을 거 같아.”라고 답했다.

 

하산한 다음 날에는 “겨울쯤에 다시 가지 않을까? 설산의 장관을 보고 싶어.”라고 말했고, 

하산하고 며칠이 지난 지금은 “또 가고 싶어”라고 말한다. 그래도 참 아름다웠으니까. 이렇게 또 힘들었던 건 이미 잊었나 보다.



백록담을 봤지 봤어.





한라산 등반을 위한 꿀팁

1. 등산화 필수. 종종 운동화를 신고 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성판악 길은 특히 길이 돌이 많아 운동화가 다 망가진다. 아마도 무릎도 함께. 등산화는 꼭 챙겨 신자.

2. 미리 나의 산행 페이스를 확인하자. KM당 얼마만큼 갈 수 있는지 평균 페이스를 알고 있으면 등반할 때 컨디션을 조절하기 좋다. 나는 애플와치에서 하이킹을 선택하고 이용하는데 찾아보면 러닝 앱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3. 물은 넉넉히! 남기더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 심적인 안정을 위해선 넉넉한 물을.

4. 화장실이 있으면 무조건 가라고 하던데 나는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한 번 이용했다. 화장실 자주 가는 사람들은 등반 구간 중 화장실 체크 필수.

5. 올라가다 보면 긴급상황에서 위치를 알려주는 그런 팻말이 있는데 관음사는 5-34가 정상이다. 가는 길에 한참 올라가도 5-13 이러면 좌절스러운데...그래도 숫자 하나씩 오르다가 30대로 접어들면 기쁘다.

무엇보다 안전이 최고. 안전하게 산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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