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떠나기로 했다
나이 마흔을 목전에 두고 남편과 함께 퇴사했다. 우리는 여행을 위해, 더 정확히는 '걷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
이건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남편에게는 결혼과 함께 따라온 일종의 과업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오랫동안 품어온 버킷리스트였다.
우리는 1983년과 1986년에 태어나, 2017년에 늦깎이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대학시절 동아리의 선후배로 만나 개인사와 가정사를 토로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우리는,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개인사와 가정사를 토로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술친구였다는 것이다. 아주 무겁고 어렵진 않았지만 썩 유복하다고도 할 수는 없던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에겐 어학연수도, 교환학생도, 배낭여행도 남의 이야기처럼 스쳐갔다. 다행히 세월이 흐르고 그 사이 조금은 철도 들며, 우리는 각자 한 사람 몫을 채우며 자립할 수 있었고, 쌈짓돈 모아 방이 두 개 달린 낙성대의 빌라에서 신혼살림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신혼여행이 가고 싶어 결혼을 결심했다. 생에 처음으로 여권을 만든 것도 그때였다. 그 신혼여행은 우리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이 가고 싶어 결혼을 결심했던 만큼, 내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늘 가득 차있었다. 모니터 저편으로 보이는 유럽 알프스의 멋진 산세, 남미 어딘가의 그려놓은 듯 한 호수들, 진홍빛과 에메랄드빛이 절묘하게 섞인 밤하늘의 오로라. 나는 좁은 세상에 갇힌 채 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
"오빠, 결혼을 하자. 올해 8월에 할래, 내년 8월에 할래?"
2016년 초여름 연애를 시작한 이래, 결혼 이야기를 자주 꺼냈던 남편과 달리 나는 결혼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던 와중 이듬해 2월, 남편에게 불쑥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에겐 수험생활을 하던 때 부터 돌로미티 알타비아라는 트레일을 일주일간 종주해보고 싶은 꿈이 있어. 그런데 지금 직장에서 나는 고작 이틀의 휴가도 붙여서 사용하기가 어려워. 휴가를 쓰려면 결혼을 해야겠어. 돌로미티는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밖에 걸을 수 없대. 성수기가 끝나는 8월에 가면 좋을 것 같아. 올해 8월에 가려면 2월에는 숙소를 예약해둬야 한대.
그 해 2월, 남편은 '신혼여행은 이탈리아의 알프스를 7일 동안 하이킹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결혼에 빠르게 동의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기 위한 결혼준비를 단 6개월 만에 마친 후, 생의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각자 28L와 35L의 배낭 하나씩만을 맨 채로, 알프스의 트레일을 자유여행으로 걸었다.
멋모르고 무모하게 떠났던 첫 해외트레킹이었다. 우리의 원정은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놀라운 풍경과 감동만을 남기며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 큰 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빌라의 전세금을 다 갚으면 최소한의 대출을 받아서 집을 마련하자. 그 대출을 갚고 나면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여행을 가자. 나는 크고 넓은 집은 필요하지 않아. 인생에 한 번쯤은 세계여행을 가고 싶어. 우리가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가고 싶어. 이왕이면 오빠가 마흔이 되기 전에 가면 좋겠다." 유라시아 횡단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자동차를 가지고 가는 여행은 어떨까. 그저 도보로 세계를 돌 수 있을까.
초반의 계획은 그렇게 추상적이면서도 단순했다. 여기서 실현된 것은, 신혼 빌라의 전세금을 다 갚은 뒤 최소한의 대출로 집을 마련했고, 그 대출을 갚고 나서 자금을 모아 여행을 떠난 것이다.
부동산 폭등을 만나며 내 집 마련은 생각보다 늦어졌고, 대출금도 생각보다 컸다. 여행은 미뤄졌고 남편은 만 41세가 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라시아 횡단은 어려웠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전 세계는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출을 갚고, 여행자금을 모아서, 퇴사하고 여행을 가자' 그 마음으로 지난한 직장생활을 버텼고, 번아웃을 견뎌냈다.
그 사이, 우리는 등산과 하이킹, 캠핑과 자연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걷고 싶은 해외 트레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휴가로 떠나기 어려운 먼 나라의 유명한 트레일들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이 여행의 방향이 정해졌다.
이건 보통의 세계일주도, 보통의 도피성 퇴사도, 보통의 디지털 노마드의 삶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계획하고 꿈꿔왔던 여행을 착실히 이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누구나 떠날 수 있는 그런 보통의 여행이었다.
2024년 5월. 마침내, 우리는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걷기 위해 떠났다. 그것은, 오래 준비해 온 꿈이며 오롯이 걷기 위한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