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이 사라진 평원에서

느린 시간 속에서, 여전히, 일

by 강별

여행을 떠나고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요일감각이었다. 월요일과 금요일, 일요일이 아무런 차이 없는 매일로 이어졌다.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오늘 무슨 요일인지 알아?"하고 물으면, 바로 대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감각 없이 맞이한 일요일, 모든 마트가 문을 닫아 계획에 없던 외식을 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일의 흐름을 따르지 않았다. 해가 뜨고 지는 하루와 발걸음이 닿는 만큼의 하루가 흘러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회사 꿈을 꾸었다. 퇴사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사무실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여행이었지만, 이 여행의 시작은 번아웃의 그림자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 그림자가 발걸음 뒤에 내내 따라붙었다.


여행을 채 끝마치지 못한채 사무실로 호출되기도 했고, 동료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해주며 회사의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대표님들과 해결되지 않는 논제를 끝없이 다시 토론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 꿈의 파편들은 가끔은 놀랄 만큼 현실과 가까워서, 꿈에서 깬 후에도 진짜 현실이 어디인지 한참 동안 혼란스러웠다.


그 퇴사 한 달 차에 나는 메세타 평원에 들어섰다.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이어지는 200km가 넘는 고원지대, 나무 그늘 없이 펼쳐진 평원의 반복되는 풍경은 지루하다는 평이 많고, 버스를 타고 이 구간을 건너뛰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부르고스를 지나며 마주한 메세타 평원은 그저 아름다웠다. 본 적 없는 지평선과 시린 하늘, 새하얀 뭉게구름들 사이에서 초록빛 물결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이것을 보러 이곳에 왔다는 확신과 감동이 매일을 채웠다.



그럼에도, 메세타 평원은 느리고 힘들었다. 부르고스를 떠난 지 닷새째 되는 날,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시작된 17km의 길 위에 섰다. 마을도, 편의시설도, 그늘도 없는 구간의 시작이었다. 17km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지극히 짧은 거리지만, 이날의 길은 유난히 길고 힘들었다.


6월의 스페인은 나날이 뜨겁게 익어갔다. 그날의 최고기온은 38도에 달했다. 아침잠 많은 우리는 8시가 되서야 길을 나섰고,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 걸음은 느려졌고, 더는 못 걷겠다며 길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겨우 그 17km를 여섯 시간에 걸쳐 걸었다. 더위를 먹은 줄도 모르게 더위를 먹은 것이다. 그제야 내가 더위에 얼마나 약한지 깨달았다. 겪어본 적 없는 환경이었기에, 햇볕 아래에서의 내 속도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보통 많은 순례자들이 부르고스부터 레온까지의 이 구간을 일주일 만에 걷는다. 대체로 평탄한 길이라 하루 평균 30km씩 걸으며 이 단조로운 구간을 서둘러 지나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루에 40km씩 걸으며 속도를 올리기도 한다. 그 길을 우리는 9일에 걸쳐서 걸었다. 부르고스까지 함께 걷던 이들은 어느새 멀찍이 앞서가고 있었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걷는 길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앞서가는 젊은 친구들의 걸음에 조바심이 났다.


힘들었던 17km의 길


하지만,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그 17km 길에서, 짊어진 짐도, 나이도, 체력도 모두 다름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는 12kg과 16kg의 배낭을 매일 지고 걸었다. 그리고 20대의 젊음은 시간을 거슬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매일같이 이어진 송별회로 체력은 더욱 바닥을 보였다. 조바심만으로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다른 속도 덕분에, 우리는 오롯이 우리만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같은 길을 걸어도 하루 이틀 사이에 날씨도, 하늘도, 들판의 색감도 달라졌다. 결코 급할 이유가 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속도대로 걸어도 겨우 이틀이 차이 날 뿐이었다.


그 속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어느 날의 일출



내가 다니던 사무실은 업계에서 평판이 좋았고, 대표님들의 인품도 동료들도 모두 좋은 곳이었다. 이제 막 일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는 시점, 어쩌면 가장 열심히 경력을 쌓아야 할 때, 나는 가진 것들을 모두 놓고 떠나왔다.


그래서일까, 연거푸 회사 꿈을 꿨다. 그 꿈속에서 걸음마다 일을 생각했다. 마흔을 앞둔 퇴사가 주는 걱정과 미련이 발을 계속 잡았다. 여기서 쉬는 일 년이 정말 괜찮은 것일까, 다시 돌아가면 어디서 어떻게 일할 수 있을까, 예전만큼의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뒤처지는 삶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내가 놓고 왔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 회사에 있었던 덕분에 내게 허락된 것들이었다. 내 것이 아니었으니 잃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누릴 수 있어서 축복이었고, 동시에 발목을 붙잡는 족쇄이기도 했다. 그 일과 그 자리였기에 누릴 수 있던 것들임을 깨달아도, 번아웃의 끝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막연하게, 그 일과 자리가 싫었다.


하지만, 하루에 20km도 채 되지 않는, 여섯 시간을 넘지 않는 걸음 속에서, 나는 놓고 온 것, 축복이었던 것, 내 것이 아니었던 것,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 되새김질해야 했다. 내려놓은 것과 내려놓을 수 없는 것과 그럼에도 비로소 떠나올 수 있던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내려놓기 어려운 것들을 내려놓은 채, 잘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움켜쥔 채로, 나는 이 길로 떠나왔다. 놓고 온 그 일들은 하기 싫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저,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따라주지 않는 걸음처럼, 조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있었을 뿐이었다.



9일 동안이나 길고 끝없는 평원을 걸으며, 비로소 나는 내 속도를 마주했다. 걸음에서도 일에서도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이의 속도를 따라가려 애쓰지 않아도, 나의 속도로 도착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배운다. 어쩌면, 그 일과 그 자리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깃들기 시작했다.


요일이 사라진 그 평원에서, 무엇을 위해 걷는지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걸어가기 위한 매일로 넘어섰다. 오늘을 걷게 하는 것은 먼 풍광, 너른 전경이 아닌, 풀숲에 노니는 한 마리 나비, 자박이는 발소리, 익숙한 멜로디였다.


그 느린 시간 속에서 내 삶의 속도를 다시 설정할 수 있었다.

하루 20km의 여유 있는 메세타 평원이 내겐 축복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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