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서 찾아가는 여유의 순간
그저 걷기만 하는데도 하루가 바쁘게 지나간다.
오전에는 길을 걷고, 오후에는 숙소에 들어와 여유를 가지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길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상상 속의 일이었다. 매일 일기를 쓰겠다며 챙긴 작은 노트와 펜은 단 세 페이지를 채우고 더 이상 꺼낼 일이 없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오전 6시에서 8시 사이에 길을 나선다. 그리고 오후 12시에서 2시 사이, 늦으면 3시가 되어야 숙소에 도착한다. 대부분의 숙소는 벙커형 2층 침대가 놓여있는 도미토리 형태로, 많게는 90명의 사람들이 강당 한 층에서 자기도 한다. 철제 또는 나무 프레임의 침대 위에는 영락없이 파란색 비닐 커버가 씌워진 매트리스가 놓여있고, 부직포로 된 일회용 침대시트와 베개시트가 주어진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낑낑대며 침대를 정리하고 나면 그제야 씻을 시간이 돌아온다.
호텔이 아닌 이상, 욕실은 모두 공용이다. 그나마 남녀가 구분된 욕실이라면 다행이다. 작은 샤워 부스에서 갈아입을 옷이 젖지 않도록 애쓰며, 절수를 위해 설치해 놓은 푸시형 수도밸브를 귀찮을 만큼 눌러야 하는 샤워실이 대부분이다.
남편과 번갈아 샤워를 마치고 나면 빨래를 해야 한다. 매일 땀에 흠뻑 젖는 옷은 손빨래가 기본이다. 세탁기라는 문명이 있지만, 세탁기와 건조기를 쓰려면 '각각' 3유로에서 5유로가 필요하다. 맥주 한 잔이 2유로, 하룻밤 잠자리가 평균 12유로 내외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값비싼 서비스다. 결국, 매일같이 손빨래를 벗어날 수가 없다. 빨래를 널고 나면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점심을 먹고 온 경우라면 다행이지만, 점심을 굶고 걸은 경우라면 서둘러야 한다. 스페인의 시에스타(Siesta) 시간, 오후 2시가 넘으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수 없다. 그럴 땐 바(Bar)에서 맥주 한 잔과 핀초(Pincho; 조그만 빵 조각 위에 한 가지 재료나 여러 재료가 섞인 것을 올린 뒤 이름의 유래가 된 이쑤시개로 고정한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방과 나바라 지방의 전형적인 간식)로 허기를 달래야 한다.
저녁을 준비하기 힘들거나 근처에 마트가 없는 경우에는 숙소에서 제공하는 커뮤니티 디너에 참석하거나 마을의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인의 저녁시간은 7시부터 시작한다. 새벽 5시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순례길에서 저녁 7시의 저녁은 언제나 늦는 감이 없지 않다. 순례자 메뉴에 함께 나오는 와인 한 병을 곁들이고, 코스로 나오는 저녁식사의 디저트까지 먹고 나면 훌쩍 아홉 시가 되고,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그래서 가능한 장을 보고 요리하기를 택한다. 장을 보러 나서는 짧은 시간이 마을을 구경하는 시간이다. 광장을 지나고, 성당을 들르고, 유명하다는 건축물을 스치듯 구경하며 마을길을 걷는다. 걸음 후에도 또 걸음이 이어진다.
저녁 준비는 가장 바쁜 일과 중 하나다. 서둘러 준비하고 밥을 먹자꾸나 해도 오후 다섯 시가 넘어야 식탁 앞에 앉을 수 있다. 공용 주방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부대끼며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편한 일은 아니다. 몇 개 없는 칼과 냄비, 서너 개쯤 있는 화구, 야채 하나를 씻으려 해도 개수대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붐비는 주방에서 밥을 먹고, 다른 순례자들이 식기와 냄비를 쓸 수 있도록 빠르게 설거지도 해둬야 한다. 분명, 점심에 숙소에 도착해서 특별히 한 것이라곤 없는 듯한데, 오후 일곱 시가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숙소에 도착해서 누릴 수 있는 자유시간은 너댓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숨 좀 돌릴까 싶으면 다섯 시고, 정신 차려보면 여덟 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그 시간도 여전히 바쁘다. 맥주나 와인 한잔을 곁들여 놓고, 옆 자리의 순례자와 담소라도 나눌라 치면 세 시간이 삼십 분처럼 지나기 십상이다. 틈틈이 오늘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SNS에 짧게나마 기록도 남겨야 한다.
무엇보다 다음날의 일정을 확인해야 한다. 내일은 어디까지 걸을 것인지, 그곳에 숙소를 예약해야 하는지, 숙소가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숙소 사정이 여의치 않은 구간들도 있는데, 이런 곳들은 하루 전에는 숙소 예약에 실패하기 일쑤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는 이틀 치의 구간을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이틀 후의 숙소를 예약해 두기 시작했다.
이 중요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날은, 결국 몸이 고생하기 마련이다.
6월 18일, 순례길에서 세 번째로 높은 오르막을 넘는 날이었다. 보통은 오르막을 다 오른 오 세브레이오(O Cebreiro)에서 숙박을 하고, 이튿날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에서 숙박을 한다. 우리는 오르막 중턱의 라 파바(La Faba)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튿날은 트리아카스텔라까지 가지 않고, 폰프리아(Fonfria)까지 17km만 걸을 셈이었다. 순례자들이 많이 모인다는 사리아를 지나쳐 가고 싶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천천히 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폰프리아에 도착했더니 60개의 침대를 가진 숙소가 만실이었다. 순례길에서 침대 60개는 작은 규모는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머무는 동네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하필, 전 날 머물렀던 라 파바(La Faba)의 숙소는 와이파이 연결이 되지 않았고 데이터 통신도 잘 터지지 않아, 별일 없겠지 라며 예약을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설상가상 오전부터 부슬비가 오가기를 반복하더니, 오후에는 천둥이 울리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순례자를 위한 애플리케이션에서, 다음 마을에 35유로짜리 숙소가 있다고 해서 들어갔더니 45유로를 부른다.
흐린 하늘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걸음을 돌아서 나온다. 대개 두 사람의 숙박비로 20유로에서 30유로를 지출하는데 45유로는 과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애플리케이션에 기재된 가격보다 비싼 가격을 부르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가 않는다.
결국, 트리아카스텔라까지 10km를 더 걸었다. 다행히 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도 비췄다. 예정에 없이 27km를 걷고 오후 3시 40분에 늦은 체크인을 한 후, 간신히 젖은 옷을 널어 말린다.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것이 다행인 날이었다.
피곤함 속에서도, 우리의 일상을 따라 저녁을 준비했다. 늦은 도착에도 익숙하게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작은 슈퍼에서 냉동 새우 한 봉지를 사들고 온다. 마늘을 편 썰어 파스타를 만들고, 비 맞으며 걸은 하루에 와인 한 병도 빠뜨리지 않는다. 소박하고 따뜻한 마무리였다.
그러고 보면, 어느덧 메세타 평원에서 맴돌던 생각들은 거품처럼 꺼지고, 걸어야 할 길이 몇 km 남았는지, 어디서 쉴지, 발바닥이 얼마큼 피로한 지만 생각하며 습관처럼 길을 걷는다. 이른 아침 출발해서 첫 바(Bar)에서 신발을 벗고 아침을 먹는다. 다시 걷다가 두 번째 바에서 신발을 벗고 맥주를 마신다. 나머지 구간을 걷고, 숙소에서 샤워하고, 빨래하고, 맥주를 마시거나, 저녁을 준비한다. 그 걸음의 사이사이에 여유는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길을 걸으며 따먹은 발간 체리, 강가에 발 담그며 마시던 맥주 한 잔, 화창한 날 발아래 고양이를 보며 신발을 털던 테라스, 산책 삼아 올랐던 숙소 뒤 언덕, 늦은 시간까지 환한 하늘을 보며 즐기는 저녁.
그 하루의 어느 순간도 허투루 보낸 것이 없었다. 이토록 밀도 있게 온전한 하루의 시간을 느끼던 날이 또 있었을까. 빼곡한 여유를 즐기면서도 오롯이 긴 하루가, 낯선 일상이 되어간다.
그 길의 그 저녁, 가만히 앉아 와인 한 잔을 따르고, 길었던 하루를 가만히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