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에서 하이커로

행복을 발견하는 길

by 강별

순례자에서 하이커가 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지나 프랑스 리옹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 샤모니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긴 이동의 시간이었다. 배낭을 메고 걷던 매일로부터 잠시 벗어난 짧은 휴식이었다. 긴 기차와 버스 이동은 지루함보다는 오히려 온전한 휴식의 시간이 되었다.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그저 감상하기만 하면 되는 시간, 그 이동 중에 다음 여정에 대한 설렘을 조용히 누릴 수 있었다.


샤모니를 향해 달리는 버스의 창 밖으로 푸른 산이 솟아오르기 시작할 때 말 그대로 감격했고, 샤모니에 내렸을 때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알프스는 우리의 첫 해외여행이고 첫 해외트래킹의 장소였다. 그 여름의 알프스 자락을 지난 7년간 늘 그리워했다. 어쩌면, 나는 알프스를 걷고 싶어 이 여행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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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여행이라고 하면 보통은 스위스 여행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알프스에서 장거리 하이킹으로 가장 유명한 트레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뚜르 드 몽블랑 (Tour du Mont Blanc, TMB)'일 것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의 국경을 넘나들며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을 에워싸 걷는 160km 내외의 트레일로, 걷는 내내 몽블랑을 중심으로 한 빙하 덮인 산군을 조망할 수 있는 풍광이 으뜸이다. 알프스 산군의 중심을 걷는 장거리 트레일이지만, 길이 잘 정비되어 있고 접근성이 좋아 여름에는 전 세계 하이커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 코스를 완주하려면 7일에서 12일은 필요하다. 회사생활을 할 때는 쉽게 엄두 내지 못하는 길이었기에, 이번 여행에서 뚜르 드 몽블랑을 꼭 걷고 싶었다.


인기 있는 코스인 만큼 예약 경쟁도 치열했다. 7월에 뚜르 드 몽블랑을 걷기 위해 12월에 루트를 짜고 산장을 예약해야 했다. 실상 7개월을 기다려 방문한 곳인 것이다. 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뚜르 드 몽블랑의 시작점에 도착했다. 샤모니에 내려서니 목조 건물들 뒤로 웅장한 산세가 위용을 떨치고 있다. 산봉우리는 자욱히 깔린 구름에 가려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알프스의 마을은 꿈에서 그리던 풍경 그대로였다.


본격적인 하이킹은 짐을 덜어내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내내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를 어떻게든 줄여보기로 했다. 두 벌씩 챙긴 반바지는 한 벌만 남긴다. 잠옷 겸 챙겼던 여름용 트레이닝 바지도 필요가 없다. 몇 벌 챙기지 않았던 옷가지들 중에서도 또 불필요한 옷들을 덜어내서 한국으로 보냈다. 잘 쓰지 않는 팔토시, 쓸 일 없던 미니 블루투스 스피커, 모자에 달아 사용하는 햇볕 가리개도 함께 보낸다. 겨우 1kg 남짓이나 줄었을까 싶지만 우리에겐 걸어야 할 길이 아직 길다. 불필요한 것을 계속 덜어내고 또 덜어내 본다. 망설임의 무게가 함께 빠져나간다.


짐 정리를 마치고, 샤모니의 거리에서 피자 한 판에 맥주로 늦은 점심을 채운다.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니 물가가 세 배는 오른 듯하다. 갑자기 비싸진 맥주 가격에 잠시 주춤했지만, 알프스의 첫 맥주를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비워낸 짐만큼 가벼워진 마음에 여유가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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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 드 몽블랑은 코스가 잘 정비된 만큼 걷는 방법도 다양하다. 다양한 출발지에서 시작할 수 있고, 시계방향이나 반시계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걸을 수 있다. 산장을 예약하지 못한 경우에는 캠핑을 할 수도 있다. 버스나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는 구간도 많아, 원형 루트로 전 구간을 완주하지 않고 풍경 좋은 곳들만 하루 코스로 띄엄띄엄 걸을 수도 있다.


우리는 샤모니의 서쪽 끝에 위치한 레우슈(Les Houches)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출발해, 9박 10일 후 샤모니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레우슈(Les Houches)로 이동해서 첫 밤을 보낸 후 이른 아침 드디어 길에 나선다. 첫날의 오르막은 케이블카를 이용해 편히 오르기로 한다. 순식간에 800m를 오르고 나니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질 거라는 언덕은 사방에 구름이 자욱했다. 안갯속 길을 따라 다음 숙소까지 17km를 걷는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길에는 알프스의 목조주택들이 늘어서있고, 커다란 방울을 단 소들이 풀을 뜯고, 만년설 녹은 계곡이 길을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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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고요한 풍경 앞에서도 마음 한켠에는 이튿날의 걱정이 뒤를 따랐다. 사전에 책자와 인터넷에서 본 정보에 따르면, 6월 말에는 하이킹 둘째 날 넘어야 하는 본옴므 고개(Col du Bonhomme)에 눈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7월 초, 눈길은 녹았을 거라 생각하며 아이젠 없이 길을 나섰는데 샤모니에서 바라본 몽블랑 산군은 곳곳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런데 마침, 숙소에 상인들이 와서 아이젠을 팔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판매 현장을 기웃거려 보니 한국에서 살 때의 두 배는 줘야 하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리고 하이커들 간의 토론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반시계방향으로 걷고 있어서 내일 본옴므 고개를 넘을 예정이었지만, 시계 방향으로 걸어서 오늘 본옴므 고개를 넘어온 하이커들도 많이 있는 것이다. 눈이 많이 있으니 아이젠을 사라는 상인, 필요하다면 구비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가이드, 눈이 있긴 하지만 아이젠 없이도 괜찮다고 말하는 반대편 길을 넘어온 하이커들. 짧은 영어에 귀를 기울이다가 결국 아이젠 없이 길을 나서기로 했다. 샤모니에서 비우고 온 짐을 생각하며, 불필요한 무게를 더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을 감출 수는 없었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위험을 무릅쓰느니 역시 아이젠을 살걸 그랬나? 어쩌면 짜증을 돋울 수 있는 걱정의 꼬리를 문 채로 길을 걸었지만, 이내, 걱정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오늘의 길은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눈길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이 나의, 우리의, 첫 몽블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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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시작하면서 으레 따라온 버킷리스트는 지리산 종주였다. 2박 3일에 걸쳐 성삼재에서 출발해 중산리로 하산하는 가장 쉬운 코스로 걸었지만, 2019년 가을의 그 첫 지리산을 기억한다. 무엇보다 노고단에서 지리산의 주 능선길로 들어서던 순간과 길의 풍경을 기억한다. 마침내 내가 지리산 주 능선길을 걷고 있음을 만끽하게 되는 순간, 우거진 숲 속에 평탄하고 아름다운 오솔길이 능선 따라 이어지던 순간, 그 순간의 감격이 무엇보다 깊게 새겨져서 그 구간은 여전히 지리산 종주길 중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다.


뚜르 드 몽블랑의 이튿날이 꼭 그랬다. 마침내 내가 알프스의 장거리 트레일을 걷고 있다는 감격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낮은 구릉의 완만하고 잘 닦인 길의 앞에 잘 생긴 바위 산이 솟아있다. 이 초록 평원과 회색 산봉우리의 모습에 그저 감탄만 연신 내뱉을 뿐이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알프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구릉 위에 멈춰 선 커플이 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우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 울음은 감격의 눈물로 내게 와닿았다. 별 수 있는가, 그 감정에 동화된 나는 영문 모르는 남편을 붙들고 함께 울었다.


사실, 그날의 눈길은 제법 험난했다. 비탈진 곳에 채 녹지 않은 눈길은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것이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등산스틱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앞선 이가 다져놓은 발자국을 몇 번씩 다시 다지며,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걸어야 했다. 발이 미끄러지면 산비탈 아래로 끝없이 구르게 될 것이다. 눈 길을 한 번 지날 때마다 아찔한 상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아이젠을 살걸 하는 후회가 몇 번이나 스쳤다. 상승고도 1300m의 오르막은 걸음을 더욱 느리게 붙잡았다. 오전 8시에 출발한 17km의 길은, 오후 4시 반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TMB_02_23.jpg 조심스럽던 눈길 구간


그럼에도 해발 2500m의 본옴므 고개 정상에 올라 만년설 덮인 알프스 산군을 마주했을 때, 모든 고생은 눈부신 풍경 앞에 녹아내렸다. 시선 닿는 모든 곳이 시리게 선명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눈 덮인 산자락과 땀을 식히는 바람이 무엇보다 달콤했다. 늦은 체크인 후 숙소 앞마당의 테이블에서 와인 한 잔을 따르고 알프스 산자락을 바라본다. 오늘의 길, 맑은 하늘, 어디를 바라보아도 푸른 산봉우리가 감싸 안아주는 풍경,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행복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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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000m가 넘는 고도를 오르내려야 하는 산길이지만,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고단함이 줄어들었다. 끝없는 도로 옆 길을 따라 걷는 것보다, 가파르더라도 오르막을 오르는 것이 오히려 더 즐거웠다. 발바닥의 통증은 사라졌고, 빨리 숙소에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줄어들었다. 오르막을 다 오른 후의 성취를 만끽하고, 그 어느 날보다 아름다운 오늘의 풍경을 마주한다.


내가 이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끗한 풍경만큼 선명해진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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