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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개 Sep 08. 2019

현실의 냄새를 환기하는 우화

<기생충>(2019)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기생충>에 대한 세간의 평이 다양하다. 우리 사회 보이지 않는 계급을 직관적으로 보여준 참신한 영화라 평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가난을 천박하게 묘사한 모욕적인 영화라 일컫는 이도 있다. 엇갈린 평 속에서도 <기생충>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그리고 있음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기생충>에 대한 리뷰와 해석, 다양한 평이 들리는 까닭은 영화가 관객에게 다층적 감정을 남겼기 때문 아닐까.


<기생충>의 서사는 마치 우화처럼 전개된다. 기우 가족은 전원 실업 상태다. 이때 뜬금없이 나타난 민혁은 왠지 모르게 주술적으로 보이는 산수경석을 건넨다. 이를 기점으로 기우를 비롯한 온 가족에게 실업 상태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다. 기우네 가족이 하나 둘 차례로 동익의 저택으로 침투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우화적이다. 집에서는 취객에게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던 기우가 어떻게 연교와 다혜 앞에서는 기세를 운운하며 이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었는지, 기정이 어떤 방법으로 다송을 얌전하게 만들었는지 관객은 이해할 겨를이 없다. 연이어 기택이 기사로 취업하는 과정부터 복숭아로 문광을 쫓아내기까지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영화가 더욱 극적인 순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반지하에 거주하는 이가 아닌, 그야말로 지하 세계에 숨어 있는 존재가 스크린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지하에 숨어 기생하는 이는 표면적으로는 영화의 우화적 요소에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우화적 인물들 이면에 은밀하게 비치는 이들의 과거는 스크린 밖 현실의 냄새를 환기시킨다. 치킨집 경영난, 대만 카스테라의 폐업, 끝없는 고시 낙방, 명문대 입학 실패 등. 이는 이들 역시 한때는 지상에서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적어도 그런 희망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지상과 지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진 것은 개인의 능력 차이 때문일까? <기생충>은 그렇게 보는 것 같진 않다. 폭우로 반지하 집이 잠기는 시퀀스에서 화면을 잡아먹을 듯 물이 차오르는 동안 카메라는 벽에 걸린 충숙의 메달을 응시한다. 살림살이가 오수에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기택이 충숙의 메달을 건져 나오는 장면은 애처롭다. <기생충>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계급의 사다리에서 미끄러진 자나, 사다리 상층부에 도달한 사람이나 근원이 다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충숙은 한때 메달리스트였을 만큼 한 분야에 재능이 있었고, 문광은 가정부로 일할지언정 남궁현자 선생의 건축물을 음미할 식견을 갖추고 있다. 이들이 반지하로, 지하로 미끄러진 것은 개인의 능력 밖 문제일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이러한 생각이 스치는 순간, <기생충>은 더 이상 우화일 수 없다. 하루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어쩌면 계급의 사다리에서 미끄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노상방뇨가 풍경인 반지하방, 또는 어떠한 풍경조차 볼 수 없는 지하방으로 내려가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우화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인 듯하다. 기택이 아마도 지하에서 다시 올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순간, <기생충>은 실소를 터뜨리며 영화를 보던 관객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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