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그리고 둘> 영화비평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 어느 일가족의 일상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반추하고 인생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우리 주위 어딘가에 있을 법하게 느껴진다.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NJ와 밍밍, 사춘기의 열병을 통과하는 팅팅 등 이들은 그 나이 즈음이면 고민할 법한 이야기를 하나쯤 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틈에 약간 비껴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가족의 막내, 양양이다. 양양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어떠한 소동에 휘말리기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 놓여있는 듯하다. 조금은 기이하기까지 한 초등학생 양양의 언동은 분명 영화에 등장하는 여타 인물들과 궤를 달리한다. 관객은 앞서 언급한 NJ나 밍밍, 팅팅의 입장에는 좀 더 용이하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지만, 양양의 행동에는 공감보다 의문을 품게 된다. 왜 영화는 인생에 대한 보편적인 고민을 겪고 있는 가족 사이에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양양을 심어둔 것일까?
먼저 관객이 영화의 서사 중심에 있는 인물들에게 공감하게 되는 지점을 살펴보자. 영화 속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인 NJ는 회사의 중역으로 조직의 성과에 막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다. 어쩌면 비슷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마음 안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나간 청춘을 상기시키는 옛사랑과 조우하게 되자 마음이 복잡해진다. 창가에 비치는 그의 고독한 모습은, 유리창 위로 포개어지는 도시의 풍경과 맞대어 세상 어딘가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을 이들을 연상시킨다.
NJ의 아내이자, 앓아누운 어머니를 둔 밍밍을 괴롭히는 것은 자신을 찾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둘러싸여 살면서도 정작 빈껍데기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상실감이다. 가정에서는 자녀와 남편, 아픈 어머니를 보살피고,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요구를 처리하며 일상을 버티고 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안에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에 무너지고 만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TV, 인터넷, 신문, 다양한 매체 등을 통해 범람하는 타인의 이야기(가십) 속에 살지만 정작 내면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때문에 의식을 잃은 어머니를 위해 무언가라도 이야기해야 하는 밍밍과 그녀의 가족들은 정작 입을 열면서도 내면의 내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막막해하고 만다. 우리는 가까운 이, 아니 자기 자신에게조차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점차 낯설어지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들 부부의 딸 팅팅은 할머니가 앓게 된 것에 대한 자책감, 옆집으로 이사 온 리리를 향한 호기심과 우정, 리리의 전 남자친구에 대한 묘한 떨림 사이를 오가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무엇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앞에서 제대로 잠 못 드는 밍밍에게 연민의 감정이 일게 되는 것은, 영화를 보는 누구나 비슷한 경험 하나쯤은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경험, 우호의 감정을 이용당하거나 되려 배신당해 본 경험, 내 주위에 발생한 불행한 일이 나로 인한 것일지 모른다는 죄책감의 경험 같은 것들 말이다.
이처럼 이들의 일상은, 그 배경이 대만이 아니라 한국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현대인이라면 겪을 법한 인생의 숙제로 저마다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일과 가정, 사랑과 이별, 과거와 미래, 후회와 불안 등과 같은 문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나 고민할 법한 내용이며, 때문에 관객들은 이들의 갈등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수용하게 된다.
한편, 관객과 정서적 공감과 유대를 형성하는 다른 가족 구성원과 달리 양양의 행동은 계속해서 질문을 품게 한다. 가령 모든 학생이 엎드려 잠든 교실에서 양양만은 잠들지 않고 뛰쳐나간다.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서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다. 할머니가 일어나실 수 있도록 말을 걸어보라는 밍밍의 요청에, 할머니는 보실 수 없기 때문에 말을 걸 수 없다는 아리송한 대답을 하고서 입을 다문다. 이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양양은, 그 자체로 영화 내에서 특수한 역할을 수행한다. 관객이 위치한 곳에서 비껴 나와 관객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마치 감독의 분신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양양이 관객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영화 내에서 아빠에게 물은 질문, 혹은 학교 선생님을 향해 외친 질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는 보지 않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지각하는 것은 완전한가?
질문에 대한 힌트로써 양양을 제외한 가족 구성원은 제각각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드러낸다. NJ는 자신과 반하는 의견을 말하는 동료의 목소리를 참지 못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밍밍은 자기 안의 목소리를 끄집어내지 않고 절에 들어가기를 택한다. 팅팅은 할머니의 표정으로 마치 할머니의 속마음을 들은 것 마냥 말하고, 양양의 상황을 지켜보았을 뿐인데 양양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대신해서 말한다. 이들이 취한 행동은 자기중심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우리가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은 제각각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둘>은 우리의 제한된 인식의 한계를 꾸짖거나 훈계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서로의 눈과 목소리가 필요할 뿐이라는 메시지를 양양을 통해 전달할 뿐이다.
양양은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특히 그의 카메라에 찍힌 누군가의 뒷모습은, 우리 스스로가 볼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뒷모습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우리의 뒷모습을 찍어 보여주는 이 작고 말 없는 꼬마는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연대가 필요한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볼 수 없기에 사진과 거울처럼 우리의 뒷모습을 반영해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일, 타인을 이해하는 일, 그리고 나 자신조차 보지 못한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의 불완전한 지각은 오히려 삶을 연대하게 한다.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준 인물이 가족 중에서 가장 작고 말 없는 이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싶다는 양양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라는 할머니의 신조와 맥을 같이 한다. 서로가 바라본 것을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그것을 경청하게 되는 세상은 양양과 할머니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양 감독이 꿈꾼 세상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