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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개 Jun 24. 2022

평평한 세상을 다져가는 이들을 위해

영화 <평평남녀>(2022) 리뷰

* 이 글에는 영화 <평평남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예술부산('22.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화 <평평남녀>


"그런 일은 여자가 해야 그림이 좋지." 사회초년생 시절, 당시 나의 상사가 우편물 수발이나 사무실을 찾은 손님들께 차를 타는 일을 지시하면서 덧붙였던 말이다. 작은 일이라도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겠다고 외쳤던 면접 때의 입사 포부에 균열을 낸 말이기도 하다. 당시만 해도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 좋아지게 여직원이 가운데에 앉아." 라는 말이 거리낌 없이 오가곤 했다. 이런 말들 속에서 직장 생활을 버텨본(?) 경험이 있다면 영화 <평평남녀>의 주인공 영진에게 감정이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평평남녀>는 평평하지 못한 세상에서 평평한 삶과 관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33살 만년대리 영진(이태경)의 좌충우돌 성장담을 그린다. 영진은 연애나 결혼은 뒤로 하고 오직 회사에 열정을 바쳐 달려왔다. 영진이 속한, 주문받은 제품만을 디자인하는 디자인2팀은 회사에서 별다른 기대를 받지 못하는 부서다. 하지만 영진은 퇴근 후 집에서까지도 자신만의 디자인을 고민할 만큼 일에 열정적이다. 그럼에도 번번이 승진에서 누락되는 와중에, 낙하산을 타고 뻔뻔히 과장 자리를 꿰찬 준설(이한주)이 나타난다. 디자인2팀의 팀원들은 업무에 대한 이해도나 능력, 경험 어느 하나 갖추지 못한 준설을 무시하기 일쑤고, 준설은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하기 위해 팀원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영진을 괜히 괴롭힌다.     


둘의 관계에 묘한 기류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준설이 영진을 따라 전시회에 동행하기 시작하면서다. 영진의 눈에 비친 준설의 열등감은 어느 새 애정의 도화선이 되고 만다. 인생 첫 연애에 들뜬 영진에게 설렘 가득한 날들이 시작되는가 싶지만 그것도 잠시. 영진은 준설이 과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를 공유하게 되고, 준설은 이를 자신의 실적으로 만들어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로 인해 둘 사이 애정전선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평남녀>는 언뜻 오피스 로맨스물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슬슬 평범한 로맨틱코미디의 궤도에서 이탈하는데, <평평남녀>의 의의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회사 내에서 기분 나쁘지만 묘하게 받아치기 어려운 순간, 남녀관계에서 애매하게 불편한 순간을 기막히게 포착한다. 업무능력보다는 ‘분위기를 좋게 하는’ 능력을 원하는 순간, 화장기 없는 얼굴과 부스스한 머리 대신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뭐라도 바른 얼굴이 필요한 순간 같은 것들 말이다. <평평남녀>는 이런 불쾌함의 순간을 코믹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쏘아 올리는 대사는 꽤나 날카롭다.     


영진은 일도, 연애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갖은 노력을 한다. 준설이 원하는 대로 그가 사준 원피스를 입고 ‘여자답게’ 굴어보기도 하고, 평소 하지 않던 화장도 시작한다. 한편, 부장을 찾아가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노력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이 모든 노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의 뻔뻔한 태도다.      


영화 <평평남녀>


영진의 갈등이 가장 폭발하는 장면인 영화 후반부의 육탄전은, 이 영화의 매력을 가장 확실히 드러내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영진과 준설은 그야말로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치고 박는데, 그 싸움이 처절하고 찌질해서 실소가 터져 나온다.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던 두 사람의 노력의 끝이 몸싸움이라는 사실에 연민과 안타까움이 배어나오기도 한다.       


대개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으로 갈등을 극복하건만, 영진은 그렇지 않다. 아, 물론 영진이 택한 길 역시 사랑으로 찾은 셈일 수도 있겠다. 다만 그 사랑이 남녀간의 애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게 차이점일 것이다. 영진은 회사에서의 성취도, 애잔한 첫 연애도 내려놓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기로 한다. 조금은 허무한 결말로 비칠 수도 있으나, 이미 굳어진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판을 짜보겠다는 결심은 어쩌면 극 중에서 과감하게 추진한 영진의 수많은 행동 중에서도 가장 영진다운 선택일 것이다.     


인물의 감정선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이 틈을 메운 데에는 배우 이태경의 몫이 크다. 그는 영진을 마치 출근길 지하철 어느 칸에서 한번쯤 마주친 것처럼 여겨지도록 인물을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어떤 때는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막무가내인 영진이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는 이유 역시 이태경 배우가 발산하는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영화 내에서 부산이라는 직접적인 배경 언급은 없다. 인물들 역시 부산 사투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산시민이라면 익숙한 배경이 눈에 띌 것이다. 영화 속 주요장소로 등장하는 센텀시티 곳곳과 시립미술관, 복천동 고분군, 송정역, 지하철 등이 반갑게 다가온다. 부산 출신의 감독이 부산에서 촬영했고, 배급 역시 부산의 유일한 독립예술영화배급사 씨네소파에서 맡았다.      


영화 <평평남녀>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평평함을 위해 땅을 다져가는 이들을 향한 응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영진의 언니인 싱글맘 하나(이봄), 그리고 여배우에서 직업을 전환한 택시기사(서갑숙)의 존재는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완전한 평평함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매일매일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영진’에게 평평한 세상을 꿈꾸는 노력을 멈추지 말자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힘을 입어 오늘도 출근길에 올라본다.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은 수많은 평평남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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