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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베이지 Nov 06. 2018

영미권 작가들의 에세이 32선을 엄선하다.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천천히, 스미는>

▲ 봄날의책, <천천히, 스미는>



1.


한 곳만을 열렬히 가리키던 인생의 지침.

그 이정표를 홱 돌려버리는 어느 한 순간을 마주한 적 있으신지요. 이를테면 첫사랑은 어떨까요. 혹은 바라던 학교에서 합격통지를 받던 황홀한 순간, 또는 동경해 온 산타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던 아찔한 순간도 을 겁니다.


<밤은 노래한다>를 쓴 김연수 작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김연수 작가가 습작을 하던 어느 날, 어머님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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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할 생각은 없고 소설만 쓰겠다고 하니 당장 저놈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걱정되시는 모양이었다. 늘 그렇듯이 실실 웃으며 "나는 잘될 테니 걱정하시지 말라"며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슬쓸하기 그지없었다.

일제히 불 밝힌 가로등처럼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2.


하지만, 인생의 지침을 바꿔놓는 순간들이 반드시 특정한 '사건'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때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도, 특정한 맥락 속에선 강렬한 기억이 되니까요. 


오늘 소개드릴 책은 그러한 순간들을 스냅사진처럼 32편의 텍스트로 찍어낸 산문선. 봄날의책에서 시리즈로 펴내고 있는 <천천히, 스미는>입니다.



영미권 작가 25인의 에세이를 담고 있는 책이에요. 대체적으로 19세기 이후의 글을 담고 있지만 주제를 특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나 헨레 데이비드 소로우의 글들을 빼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라고 해요. 이를 테,




아버지와 함께 보낸, 마지막 여름의 한 순간을 담아낸 <녹스빌 : 1915년 여름>.

어느 초가을 아침, 창턱에서 비틀대며 날개를 펴려는 나방의 투쟁의 순간을 담아낸 <나방의 죽음>.

감정이 확립되기엔 너무나 어렸던 시절, 검시를 앞 둔 누나의 시체를 마주한 순간을 그린 <어린 시절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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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그 다채로운 무엇과 그것을 이루는 찰나의 장면들. 이를테면 삶의 결정적 고비가 된 사건들, 삶에 있어 생채기로 남은 순간들...작가들이 산문의 형식으로 펼쳐내는 수려한 책이에요.








저녁 식사는 여섯시였고 삼십 분 후면 끝났다.


아직 햇빛이 남아 부드럽고 흐릿하게 조개 속껍질처럼 반짝였고 그 흐릿한 빛 속에서 모퉁이 탄소등이 켜지고 메뚜기가 울기 시작하고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이슬 맺힌 풀밭에 개구리 몇 마리가 팔딱거릴 무렵 아버지들아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무작정 서로 별명을 외치며 달려 나가고 나면 십자멜빵을 맨 아버지들이 한가로이 뜰로 내려섰다. 어머니들은 부엌에 남아 그릇을 씻고 말리고 치우며 평생 반복되는 꿀벌의 여행처럼 흔적 없는 자신의 발자국을 되밟고 아침에 먹을 코코아 가루를 계량해두었다.


앞치마를 벗고 어머니들이 밖으로 나오면 치마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머니들은 현관 베란다 흔들의자에 말없이 앉았다.


녹스빌:1915년 여름 -<천천히, 스미는>






이 글을 쓴 저자는 제임스 에이지. 1909년, 여섯 살이 되던 해 교통사고로 우체국 직원이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녹스빌 : 1915년 여름>은 아버지를 잃기 직전, 어느 여름날 저녁을 회상한 글입니다.


당대의 목가적인 풍경과 생활사를, 수려한 문장들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데서도 함의가 클 테지요. 하지만 그보다, 짧은 일상의 귀퉁이를 잡아 끌어내 총체적인 인생으로 확장해나가는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지 않은가요.



아빠가 존재하던 어느 여름밤의 아름다움은, 이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슬픔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에는 미묘한 감정. 도무지 말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을 미학적으로 구현해내고 있어요.





▲ 천천히, 스미는









<천천히, 스미는>에는 F. 스콧 피츠제럴드, 조지 오웰, 윌리엄 포크너 등 당대의 걸출한 작가들의 산문들이 엄선되어 수록돼 있습니다. 


수록된 산문들은 짧게는 7페이지 정도에서부터 길게는 20여페이지. 언제, 어디에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탁월한 에티카를 내장한 글도 있지만 윤리적인 의도는 잠시 접어두고, 가볍고 경쾌한 템포로 쓰여진 글들도 함께 수록하고 있어요.




직선적인 대답을 마련해주는 책은 아닙니다.

명쾌하고, 간편한 해설을 구비해두고 있지도 않아요.




오히려 죽음이나 불운, 불행과 불안에 관해 어떤 인상만을 제시하고 있어요. 길로 치자면 쭉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랄까요.




함부로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책은 어딘가 위험해 보입니다.

우리 인생을 흔드는 많은 것들은 때때로 명쾌하지 못하므로...




<천천히, 스미는>은 누구나 마주할 그런 순간들을 미리, 혹은 다시금, 목도하게 합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그저 묵묵히 재연할 뿐입니다.




정말 힐링이란 게 있다면 역시 매체에서 남발하는 조언의 형태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먼저 그 구불구불한 길을 걸었던, 때로는 그 길목에서 쉬어 갔던, 이야기 자체가 아닐지요.




이 책을 시작으로 '봄날의책'에서는 보다 현재에 더 가까운 영미권의 산문선을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산문선을 펼쳐낼 예정이라고 해요.





에세이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께, 혹은 남발되는 에세이에 피로감을 느끼는 분들께도 동시에, 예쁜 포장지로 리본을 묶어 선물하고픈 책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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