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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10. 2024

세상을 크게 살리는 종교

개벽라키비움-천도교회월보강독 

2024년 7월 10일, 오전 10시, 개벽라키비움에서 

[개벽통문24-32] 1. 어제(7.9) 개벽라키비움-천도교회월보강독회가 진행되었습니다. 덕암 성강현 동덕이 "사회와 세계는 인심 명령 하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15, 김중기), "성경신법 지키는 말씀"(15, 이종일) "세계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15, 김홍구) 세 편의 글을 발제하고, 제가 "종교와 세계의 관계"(16, 김중기)를 발제하였습니다. 


2. 어제 글에서도 주류는 '종교' 문제였습니다. 당시(1911)는 천도교가 '천도교'로서 선포(1905)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고, 또 서양에서 도래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급속하게 퍼져나가며 새로운 풍속(학교, 병원)을 만들어 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무엇보다 1910년 이래로,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한 '단체'는 모두 해산되고 오직 '종교'와 '유사종교'만이 단체를 이루고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이 시기에 천도교는 '종교'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체제를 수립하는 과제와 또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문명한 종교'와 '대결'해야 한다는 과제, 그리고 오래된 종교들(유교, 불교 + 기독교)에 대하여 신생종교로서의 '차별화'를 해야 한다는 과제 등등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천도교는 '국권회복'이라는 이면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모색을 계속하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1904년 전후의 진보회(일진회) 운동, 1905년의 종교화운동 그리고 이 시기 언론(만세보), 출판(각종 교서 출간), 집회(대한협회) 등을 통한 민중계몽과 사상투쟁(對일진회, 시천교) 등도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4. 1910년의 <천도교회월보> 창간은 지난 10년(1900-1909)간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활동의 성과들을 정리하면서, 좀더 긴 안목으로(1909년까지의 국권 수호, 문명 개화 등을 위한 직접적, 단기적 운동이 '국권 피탈'이라는 잠정적 실패의 결과로 귀결되었기에) 우리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단(동학 천도교)의 장래를 모색하는 일로 전환(?)하던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1910년대 초반의 천도교회월보에는 1900년대(1900-1909)에 발표된 교서의 내용을 토대로 한 글쓰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어제 강독 시간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 전에도 여러 차례 말했지만, 이 시기 글들은 무엇보다 '현재성'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 이유로는 위의 3, 4항에서 얘했듯이 이 시기에 '종교' 개념에 대한 다양한 고민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또 사회적으로 대전환(변환)이 전개되던 때였기에, 오늘날 종교가 '탈종교' '망(亡)종교'의 대전환기에 처해 있다는 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탈성장' 문제가 현실적인 과제로 등장할 만큼 대전환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는 점 등에서 어쩌면 1910년 전후 시기와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 글들은 재미집니다. 


6. 제가 발제한 김중기 님의 글 "종교와 세계의 관계" 중에는 '대종활교(大宗活敎)'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시기 천도교회월보의 글 중에는 여러 필자가 이 '대종활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대종' '활교' 등 포함) "크게 살리는 종교", "종교의 사명은 나와 세상을 크게 살리는 데 있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보면서 드는 느낌은,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현행의 제도(의례)나 관습이 아니라 "크게 살리는"이라는 그 사명과 의미의 측면이라는 점입니다. 어제 마침 다른 분의 글 "한국사회 종교의 책임과 역할"이라는 발표글을 미리 접할 기회가 있어서, 이러한 문제('세상과 사람을 크게 살리는 종교')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10년 전 천도교회월보의 '현재성'을 재확인하고, 우리 사회(한국? 세계?)의 정체성(停滯性)에 대해서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우리는 어쩌면 '대전환' '급격한 변화'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인류, 인간은 왜 이처럼 변하지 않는가"(cf.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고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질문이 올바라야, 바른 대답을 얻는 법입니다. 


7. 쨍쨍한 아침입니다. 해뜰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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