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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Aug 07. 2018

이젠 넘어져도 괜찮다

털고 일어나 봤으니까, 털고 일어나면 괜찮다는 걸 아니까  


손목이 이렇게 중요한 부위인 줄 알았더라면 싸구려 팔찌라도 하나 채워줘 볼걸 그랬다. 번잡스런던 어린 시절에도 한 적 없던 손목 깁스를 무려 111년 만의 폭염 속 하고 보니 괜히 그것이 후회됐다.


돌아보면 30여 년 동안 혹사당한 그에게 해준 것이라곤 파스가 고작. 깁스를 풀면 단돈 천 원짜리 팔찌라도 채워주리라. (최근 팔목을 두른 땀띠가 팔찌 비스무리하긴한데 예쁘진 않고 '숭하다')


전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0년 가까이 컴퓨터 작업을 무척 오래 하는 업무를 해오다 보니 손목의 욱신거림을 동네에 어슬렁거리는 똥개마냥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문제였을 뿐.


일터에서 나온 뒤 '손목 통증 아디오(addio)'를 외쳤는데 요가와 현악기 연습에 푹 빠져 산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손목이 '고마해라~ 마이 해무따'를 외치며 파업을 선언했다. 미련하게 놀면서 혹사시키는 손목은 옆동네 다른 아지매의 손목이겠거니 생각했었나 보다.


일주일이면 괜찮을 줄 알았다. 안 괜찮았다.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은 "염좌라 2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는데 2주가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어떤 주사를 맞으면 괜찮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어떤 주사는 버는 돈은 없고 쓰는 돈만 있는 사람(=나)이 내긴 조금(솔직히 많이)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주사 안 맞고 계속 깁스하고 있으면요?" "느리긴 하지만 손목을 안 쓰고 쉬어주는 게 몸에 부담이 가장 적긴 하죠" 콜! 내가 원하던 대답. 그렇게 돈과 일상을 맞바꿨다.


빈야사요가 초보자인 나의 요가 수련은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 수련의 포인트 중 하나는 팔 굽혀 펴기와 비슷한 팔의 균형인데 손목 사용이 제한되면서 손목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는 요가 수련을 잠시 쉬기로 했다.


오른손으로 활을 쥐어야 하는 첼로도,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실은 손바닥과 손목까지 사용하는 글쓰기 역시 잠시 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평화롭게 잘 채워져 있던 일상의 바구니가 송두리째 비워졌다.


그 자리를 독서와 영화감상, 텔레비전 시청, 수다, 멍때리기가 채웠다. (정확히는 나열된 항목의 역순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일터를 박차고 나온 뒤 가장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들리 켜켜이 쌓여 흘러가고 있었다.

전력질주도 아닌 가벼운 산책 중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무릎과 코가 깨진 것은 물론 앞니까지 부러진 모양이지만 처음엔 무덤덤했다. 가끔씩은 즐겁기도 하더라. 유쾌하진 않은 이 아픔과 상처, (처음엔 오랜, 점점 잠시 간)좌절, 이내 밀려오는 체념. 이 익숙한 분위기, 뭐지?


10년째 격무와 그로 인한 우울증 및 번아웃 진단, 면역질환인 류마티스 진단. 올해 초 큰 울타리에 걸려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고, 겨우 털고 일어난 자리에서 다시 큰 장애물을 마주하고 주저앉았던 시간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뭐...코가 깨졌으면 마데카솔 발라 새살 솔솔 돋게 하고, 앞니가 부러졌으면 라미네이트 하면 되는걸.


1번, 2번, 3번, 4번... 또 넘어지고 일어나는 고약한 경험이지만 넘어져도 '털고 일어나면 되지 뭘' 할 수 있게 된 것이 나름 성과라면 성과일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실패와 좌절을 '찬양'하는 건 네버 니지만(저 마인드 세젤싫).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베스트이지만 하도 넘어지다 보니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게 남는 장사"라며 체념이라면 체념이고, 달관이라면 달관인 경지가 됐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지.


어쩌면 운다고, 화낸다고, 짜증낸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던 기억들이 스스로를 '그냥 털고 일어나자'는 결론으로 떠밀었는지도 모른다. '프로', '완벽주의'라는 허울만 번지르르한 말들 속에 숨겨진 '호구 취급' 속으로 나를 들이민 것도 나 자신이고, 손목을 '활동정지' 수준으로 만들어 벌인 것도 나 자신이니까.


게다가 울타리를, 벽을, 돌부리를 걷어찬다고 해도 아팠던건 내 발이었으니까. "아픈 건 됐고, 쪽팔린데 빨리 일어나자"라고 스스로를 쓰담 쓰담하며 어서 일어나도록 하는 수밖에. 물론 요즘도 불연듯 억울함이 쏟구칠때가 있지만.


아무튼 손목아, 앞으로 내가 잘하께~ 불쌍한 나 좀 봐주고 이제 현업복귀 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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