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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별 Dec 18. 2020

여행(旅) 말고 여행(旅行)

2년 전 퇴사 여행 후 적은 글

이 글은 2019년 초에 내가 퇴사 여행을 다녀오고 적은 글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도 이제 한 달이 넘었다. 약 두 달 간의 여행이니까 그 반절만큼 또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나는 2월 28일에 퇴사하여 3월 22일부터 5월 31일까지 약 70일 정도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긴 여행을 가려고 퇴사한 건 아니고 퇴사를 하고 나니 지금이라면 비교적 긴 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시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남편은 내가 여행을 가든 말든 상관 없는 것 같았다. 행선지를 일본으로 고른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고 먼 곳으로 가기 싫은데 적당히 외국이면서 내가 어느 정도 대처 가능한 곳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가마쿠라에서 10일, 도쿄에서 30일, 교토에서 30일 이렇게 기간을 나누었다. 기왕이면 10일을 더 추가하여 80일 간의 일본일주를 할 수 있었겠지만 돈이 없었다. 70일만 해도 상당한 돈이 들었다.


이 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70일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짧은지 긴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대략적인 예약을 마친 후에 나는 이 여행이 정말 일어나기는 하는 사건인가 하는 의심도 자주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언젠가 진짜 일어날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흐르는데 빈곤한 나의 상상력으로는 지각하기 어려워서 그 날이 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영영 오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기분으로 거리를 나다니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도 어려웠다.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내 안에서 펼쳐졌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갈 시점이 다가왔을 때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남편과 고양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여행 하는 동안은 정말 많이 걸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하루에 30분 걸을까말까 했는데 거의 하루에 평균적으로 10~12km 를 걸어다녔다. 정말 계획도 없이, 대충 매일 몇 시 쯤 나가자는 생각으로 일어나서 무작정 바깥에 나온 다음에야 그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그런 면에서 매우 편했고 내가 혼자서 나다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그때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바닷바람이 좋으면 바다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보면서 해변가에서 책을 읽었다. 평생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수상 스포츠도 해봤다. 3월 말의 약간 쌀쌀한 가마쿠라 바다에서 SUP 보트를 타 본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보트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균형을 잡고 있다가 두 발로 일어서는 게 가장 힘들었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보트를 불규칙적으로 흔들자 내가 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어딘가 먼 곳의 바다에서도 이런 식으로 파도가 치고 있을 것이고, 더 먼 거리에서 달이 바닷물을 흔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가 아주 작은, 정말 작은 먼지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보트를 타면서 연거푸 바다에 빠질 때마다 이 느낌은 더욱 강하게 들었다. 서퍼들은 이런 감각을 나보다 훨씬 더 자주 느끼겠구나 생각하니 인간 하나하나가 훨씬 더 개별적인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이 내가 한 체험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기만 할 뿐 100% 진실에 가까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 하이킹을 한 것도 재밌었다. 한 등산 만화에서 가마쿠라 하이킹 코스를 보고 나도 여기를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된 길이라 사람 발자국 모양이 바위에 남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발자국이 남은 바위도 봤는데 너무 신기했다. 몇 백년 전의 사람은 무슨 마음으로 그 길을 걸었을까. 시간을 빨리 되감기하는 상상을 한다. 2019년의 나나 몇백년 전의 사람의 마음이나 그리 다를 것 같지 않았다. 혼자 산길을 걷다보면 들리는 건 산새소리밖에 없었다. 그때 뭔가 진지한 생각도 해보면 좋았겠지만 여행의 대부분은 별 생각 없이 보냈다. 나중이 되어서야 밥벌이 걱정을 하긴 했다. 고민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만두기도 했지만. 대체로 어떻게 하면 더 즐겁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주로 생각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호기롭게 가마쿠라에서의 일정을 10일이나 잡았지만 실제로 가마쿠라는 작은 동네여서 4~5일 쯤 되자 딱히 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갔던 바닷가를 또 가기도 하고, 에노시마에 가보기도 하고, 고마치거리를 하릴없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에서 구름이 살짝 덮힌 후지산을 보기도 했다. 원래는 보기 힘든 풍경인지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시간은 꾸역꾸역 지나가서 도쿄에 갈 날이 오게 되었다.


가마쿠라에 있을 때도 벚꽃이 막 피어날 무렵이었는데 도쿄에 도착했을 때도 마침 벚꽃이 개화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두 번이나 새로운 마음으로 꽃놀이를 할 수 있었다. 도쿄는 이미 몇 번이나 온 곳이기도 해서 그렇게 열심히 관광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못 다녔던 전시회를 몰아서 구경한다는 마음으로 도쿄 곳곳의 전시회를 순례하고 뮤지컬도 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도쿄의 숙소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기만 한 적도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내가 사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얼마를 어떻게 지불해도 살 수 없는 시간을 내 맘대로 흘려보내는 기쁨. 한참 흘려보내면서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불안도 피어올랐지만 지금이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할 일이다 싶어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도쿄에 있는 동안 남편이 한 번 도쿄로 와주었다. 남편과 떨어져 있게된 지 3주 쯤 지나서였는데 그리 긴 시간이 아닌데도 함께 있는 동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여행을 가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디데이를 계산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오고 나니 남편이 옆에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럼 행복할 텐데 하고 행복의 정의가 바뀌었다. 깊이 잠든 남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상황에 따라 행복의 정의란 너무 쉽게 바뀌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할 거라고 믿겠지만 막상 그 상태가 되면 또 조건이 바뀔 거라고, 어쩌면 계속 바뀌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다 죽는 게 일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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