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ARANTH Aug 12. 2019

동서기의 잡초 뽑기

9급 공채 면접 때 나를 당황하게 했던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9급으로 임용을 하게 되면, 동 주민센터로 발령이 날 텐데, 동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면접 학원에서도 공무원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식의 답변을 가르쳐주었지 동 주민센터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 역시도 공무원 시험공부하면서 연금이랑 정년보장은 알았지 9급 공무원이 동 주민센터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배우지도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살면서 동 주민센터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밖에 가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생긴 줄도 사실 모르겠더라. 결국 나는 임기응변으로 답변을 둘러댔다.


“등본 초본 그런 민원 관련 서류를 발급하고...”


말을 하면서도 참 부끄러웠다.

면접관님은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시며 이야기하셨다.


“그렇죠. 그런 민원서류 발급도 있지만, 그건 일부분이랍니다. 동 주민센터는 꽤 큰 조직이에요. 국가의 선거 실무를 수행하는 기관이고, (선거는 준비 기간도 길지만, 치르고 나면 뿌듯한 일 중 하나다.)

민방위 대원을 관리하고, 형편이 어려우신 분들을 돕는 복지부서도 있어요. 그리고 주민자치위원회, 새마을 단체 같은 주민들로 구성된 단체를 관리하기도 하고, 주민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 운영도 하지요. 여름이나 겨울엔 자연재난에 대비해서 관할 구역 예찰 활동을 해야 하고, 평소엔 동의 환경정비도 책임지고 해야 하죠. 뭐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다음 질문이 있으니 이 정도로 하고. 앞으로 공직 생활을 하려면 기본 중의 기본이니 이제라도 꼭 기억하세요.”


시간이 지나서 그 당시 면접관님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셨던 업무는 동 주민센터의 뒷 다이의 업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합격 후 공무원 교육원에 있을 때 저 중에 하나를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교육 막바지 즘에 모든 교육생은 시청 산하기간에 하루 동안 공직 체험을 나갔다. 나는 우리 조원들과 함께 강을 관리하는 사업소에 배치되었다. 처음으로 현장에 가는 날이라 한껏 긴장하고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갔다. 그리고 우리는 잡초 뽑기 임무를 부여받았다. 아직 정식 임용도 안 된 교육생이 실무는 할 수 없고, 그리고 사업소는 민원 부서도 아니었고, 단순 노무를 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도 했다.


신고 왔던 구두를 벗고 장화를 빌려 신고, 목장갑을 끼고, 밀짚모자를 쓰고 낫을 들고 강변으로 나갔다. 9월 초였지만 여전히 더운 여름이었다. 땡볕 아래에서 몇 시간 동안 정말 풀만 뽑았다. 사실 뭐가 잡초인지 진짜 풀인지 구분도 안 가는데 그냥 시키는 대로 낫질을 했다. 남자 동기의 흰색 셔츠는 땀으로 이미 흥건했고, 여자 동기들은 쭈꾸리고 앉을 힘도 없어 그대로 뻗어버렸다. 몇 시간쯤 낫질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어찌나 꿀맛이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그냥 재미있는 공직 체험의 일부이고 정식 임용되면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문서 만들면서 일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진짜 환경정비라는 업무의 하나인 줄 몰랐으니까.


환경정비. 관내 청결을 유지하는 업무. 쓰레기 줍기, 잡초 뽑기, 화단 가꾸기,  관내 도로나 인도 파손을 점검하고, 재난 대비 하수구 낙엽 줍기 등의 일들이 포함된다. 주로 지방 행정직 8급 남자들이 하는 업무로 통한다. 요즘 들어서는 여직원들도 많이 하는 추세이다. 옛날에는 그러니까 지금 과장님들이 9급, 8급 시절에는 이 환경정비라는 업무가 정말 중요한 업무였다고 한다. 환경정비로 유명했던 국장님이 계셨고, 환경정비 잘해서 과장님으로 승진하신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주로 주민 단체 관리와 민방위 업무, 주거지 주차장 관리 업무 등이 덧붙여진다.


틈틈이 동차를 타고 관내를 순찰하고, 구청에서 처리해야 할 사항들을 조사해서 현장 사진을 찍어 공문을 발송하고, 주민 단체원들과 함께 쓰레기 줍기 등 청결활동을 한다. 실적 보고도 해야 하니 청소를 할 때마다 현수막을 들고 동 이름이 크게 적힌 조끼를 입고 단체 사진 찍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명절 전에는 구청장이 직접 현장을 점검하러 나오기도 하기에 동장님의 신경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진다.


우리 동기 중 가장 큰 언니(40대)가 어느 동에서 환경정비 업무를 할 때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동에 구에서 제일 높은 분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동장님의 환경정비에 대한 관심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동에서부터  높은 분이 집으로 가는 길 전부를 둘러보시곤 잡초가 너무 많다며 언니를 현장으로 보내셨다. 언니는 그 한 여름 땡볕 아래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여름 내내 낫질을 해야만 했다.


작년 겨울 환경정비하던 어느 날

나는 이 업무를 7급 때, 작년에 동에 있을 때 해보게 되었다. 우리 관내에 꽤 큰 버려진 공터가 있었다.

주민들이 내다 버린 각종 음식물 쓰레기, 일반 쓰레기, 먹다 버린 커피에 꼬인 벌레들 말 그대로 x판이었던 곳. 사유지임에도 불구하고 동에서 나서지 않으면 누구 하나 청소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큰 불편이 될 곳이었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꼭 주민 단체원들과 함께 청결활동을 했다. 큰 쓰레기 봉투가 몇 봉지가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였지만 청소 후 깨끗해진 자리를 보면 뿌듯하기도 했다. 물론 수일 내로 다시 주민들이 다시 쓰레기를 갖다 버릴 땐 속상하기도 했지만.



동장님도 환경정비를 잘하셔서 승진을 하셨던 분이라(그렇다고 하더라) 청소하러 나가면 전문 청소꾼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시곤 했다. 풀 숲에 숨어있는 쓰레기를 찾는 능력과 흙속에 묻힌 쓰레기를 한 번에 끌어 담은 갈퀴 사용 기술은 단체원들도 놀라게 하는 프로의 모습이었다.


계절별 바뀌는 초화를 도로변 화분에 심는 것도 나의 임무였다. 아침 일찍 양묘장에서 초화를 받아와 노인 일자리 어르신들 혹은 단체원들과 함께 기존 화분에 죽은 식물을 걷어내고, 새 초화를 심고 흙을 다지고 물을 주고 그렇게 30개가 되는 큰 화분을 정리하고 나면 반나절이 꼬박이다. 쓰레기 무단 투기가 빈번한 작은 공터에는 단체원들과 함께 작은 화단을 조성하기도 했다. 화단을 조성하고 나서 정말 쓰레기 투기가 줄어들었을 땐 함께 단체원들과 함께 기뻐했다.


사실 7급이 되고 나서 했던 환경정비 업무는 재미있었던 업무 중 하나다. 이쯤 되면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부담보다는 그냥 바깥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이 편해진다. 더불어 9급, 8급 땐 주민 단체가 그렇게나 불편했는데 한결 익숙해진 탓도 있다. 하지만 내가 8급 때 이 업무를 했다면 분명 지금과 같이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남자 직원의 경우 “남자”라서 부담이 크다. 환경정비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허드렛일이 추가된다. 동장님은 아무래도 남자 직원이 좀 더 편할 것이고, 요즘 동에 워낙 여직원 숫자가 더 우세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을 들거나 운전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남자 직원들이 봉사 정신을 발휘하는 편이다.


또한 단체원들 부탁을 안 들어줄 수도 없어서 그에 따른 추가 업무도 생긴다. 여름에는 10kg짜리 소금 포대자루를 몇 포대씩이나 이고 지고 옮기며 단체원 활동을 도와야 하고 그 밖에도 헌 옷이며 책이며 겨울 김장 행사를 위한 배추를 나르는 일이며 짐꾼 역할을 맡아한다.


낮에 하루 종일 바깥에서 청소며 짐 나르는 일이며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가 땀범벅이 되어서 돌아오면 구청에서 온 전화, 주거지 주차장에서 날아온 극성 민원사항들 그리고 제출해야 할 공문이 반긴다. 앉아서 조금 일을 해볼까 싶으면 퇴근하시던 동장님이 오늘 어디에 누구를 만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으신다. 그러면 계급 문화의 규칙을 알기에 할 수 없이 하던 일을 접고 분장에 없는 업무를 하러 따라나선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의 8급 남자 직원들은 하루빨리 동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단 신입의 허무함이 9급 민원을 보면서 온다면, 8급 때는 여자의 경우 동에서 서무회계를 보면서, 남자의 경우는 환경정비와 단체 업무를 보면서 두 번째 허무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이 시청 전입 시험을 결심하게 된다. 좀 더 자신이 생각하는 "일"에 더 가까운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가족 일원이 증권회사 엘리트인 동기 언니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동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냥 부끄럽다고 한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의 오빠가 늘 입버릇처럼 공무원만큼 쉬운 일이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돈 많이 준다고 해도 그가 잡초 뽑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하마터면 서무회계만 할 뻔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