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ope A LOV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하 Dec 29. 2015

혼인 시나리오

문화, 시대, 장소에 따른 결혼과 사랑 그리고 성

사람들 간의 생각 차이 중에는 결혼에 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비혼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더러 책임감 없는 이들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 '못'하는 이들의 정신승리로 치부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이면 당연하게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여겼던 결혼이 정말로 당연한 일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택 중 하나임에 불구한 결혼과 사랑을 당연하게 만든 시대와 문화에 대해 들여다보자.

 

관찰에 도움이 될 글을 소개한다. 아래는 91년도에 발간된 조한혜정 선생님의 책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굳이 20년도 더 된 책의 구절을 가져왔지만 개개인에게는 일부 진척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네 사고방식이 이보다 더 나아진 것 같지도 않다. 특히 조한혜정 선생님이 건네는 마지막 화두는 개인적 사회적으로 성찰하기에 좋다. 요즘처럼 포르노사이트의 사회적 악영향이 양지로 드러난 때에는 더욱.




결혼과 이성간의 사랑과 성은 엄밀히 별개의 영역들이다. 그러나 인류사를 통해 볼 때 흥미롭게도 이들이 둘씩, 또는 셋씩 마치 서로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짝지워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서구 사회에서 결혼과 사랑, 그리고 성에 따른 문화적 각본은 크게 봉건, 근대, 탈 근대의 시기로 나누어 단절적으로 나타난다. 봉건시대에는 결혼과 생식의 수단으로서의 성이 짝지워졌고, 근대에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이제 탈근대로 넘어 오면서는 결혼에 대한 거부와 함께 성과 낭만이 묘한 결합을 이루게 된다.


서구 혼인의 각본 : 중매혼 → 연애혼 → 성해방


1) 봉건적 각본 : 중매결혼과 생식의 도구로서의 짝짓기


농업이 생산의 기초인 봉건사회에서 결혼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었다. 오히려 결혼과 출산을 위한 성이 사회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이 사회의 기본단위는 토지공유와 친족적 노동력, 그리고 신분세습을 기반으로 한 확대가족이었다. (1) 정치와 종교 중심의 절대주의, (2) 종족적 협동중심의 혈연주의, (3) 공동체적 합일을 추구하는 의례주의, (4) 세대를 통한 연속성의 강조가 이 시대의 문화적인 특성을 이루었다.

체제 유지와 출산력이 중요한 사회인 만큼 이 사회에서 결혼은 성과 짝지워졌다. 높은 신분을 유지하려는 상층부에서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특권을 고수하며 신분 상승을 이루어낼 남자 상속자를 낳기 위한 제도였으며 집단간의 계약이었다.

이 시대의 결혼은 '어른'들의 협상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중매 결혼에서 결혼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고려될 필요가 없었다. 여성의 정절이 강조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나타났다.



2) 근대적 각본 : 낭만적 사랑과 연애결혼의 짝짓기


서구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이성간의 사랑과 연애결혼이 대중들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근대적 개인성'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1) 경제적 : 공장제 생산에 따른 '자유로운 노동자'의 출현
2) 사회적 : 전통적인 권위로부터 급격한 이탈이 종용되는 획득적 신분사회로서의 이행
3) 문화적 : 공동체적 관계가 끊어지고 개체화 되면서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주관주의적 문화의 출현

위 3가지 변화는 낭만적 사랑, 연애결혼, 부부중심의 핵가족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상과 밀접하게 엇물려 나타난다.

이 시대의 남녀관계는 주로 사랑을 중심으로 각본화하는데 (1) 열렬한 연애, (2) 부모들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3) 사랑이 마르지 않는 부부애, (4) 가정적 사랑을 통한 자아실현 등이 그 각본의 구체적 내용이다.

남자와 여자가 자신이 선택한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새 가정을 이룬다. 부모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봉건'으로부터도 벗어나는 이 '근대적' 가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는 중심이 된다. 특히 가정이 인생의 전부인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결혼으로 골인하는 사랑에 빠지는 일'은 일생 일대의 사업으로서 지대한 의미를 갖는다.

폐쇄적인 공간으로서의 핵가족과 부부만의 침실,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 독립이 강요되는 자녀들의 처지, 남편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을 자녀에게 기대하는 어머니들의 왜곡된 사랑, 강해지는 또래집단의 영향력 등은 낭만적 사랑을 부추기는 물적 토대이자 감성적 온상으로 작용한다. 이 과정을 통해 연애결혼이 정착된다.



3) 근대적 각본의 변형 : 감각적 사랑과 물상화된 성


가족에 대해 매우 새로운 인식을 갖는 새 세대가 후기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등장한다. 이들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가족의 보다 풍요한 삶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한 기억을 가진 부모 세대와는 분명히 단절적 경험을 갖는 세대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직결된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남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하는 '진정한' 개인주의 세대로서 윗세대보다는 훨씬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세대이다. 이들은 결혼, 낭만적 사랑, 그리고 성이 아무런 필연적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들임을 알고 있다. 이들에게 결혼은 부담스러운 제도이며 피해야 할 어떤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성과 부부관계를 연결시키지 않으며 그러한 모든 의무적 관계를 우습게 본다.

이 세대의 각본은 성을 중심으로 한다. 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메마르고 황폐한 삶 속에서 진한 합일의 감정을 주는 어떤 구원의 상징으로서의 성에 매달린다. 피임술은 생식의 수단으로서의 성과 쾌락의 원천으로서의 성을 분리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성과 육체는 새로운 시대의 담화의 핵심부에, 푸코의 논의에 따르면 새로운 통제의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4) 제 3세계적 각본, 그 피상성과 상투성


상기 서구의 시대사적 재구성을 시도한 논의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1)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적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의 산물로 간주해온 사랑과 결혼, 그리고 성에 대한 생각은 실은 하나의 문화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
(2) 고도의 정보화 기술을 토대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통제는 봉건사회나 근대사회에서와는 전혀 다른 형대로 이루어진다는 점


권력은 이제 더 이상 금지나 신체적 처벌 등 강압적인 기제에 의존하여 지배하지 않는다. 새로운 욕망을 부추기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적극적 관심을 쏟게 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다른 것에 관심을 쏟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발적 충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 정보 중심의 시대에 들어서면 권력은 제도적인 억압기제보다, 창출된 이미지들이 진리인 것 처럼 보이는 효과를 내는 문화적 기제를 통해서 보다 손쉽고도 철저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성과 사랑, 그리고 결혼에 관련된 경험세계가 서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피적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 표피적 유사성 밑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그 점을 나는 상투성(常套性)피상성(皮相性)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상투성이란 단어를 쓰면서 나는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밖에서 주어진 정해진 각본대로 연기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체화되지도 못한 역할을 그는 어리석게도 계속 반복한다.

피상성이란 단어는 그러한 행위가 단순한 흉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문화적 축적에 어떠한 자국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버리는 현상과 관련된다.


먼저 문화적 각본은 그 자체로서 억압적인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자. 그것은 시대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그 기능이 끝나갈 때 억압성을 드러내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서구적 각본들은 그 시대의 물적 조건과 상응하면서 나타났고 각 단계적 삶에 새로운 질서와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구체적으로 연애결혼은 근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끈적끈적하고 부담스러운 봉건적 관계'를 청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개인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도덕성을 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첫째로 연애의 각본은 연애 관계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적극적 관심과 애정을 퍼부어야 함을 지시하면서 바로 그 지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의존이나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동시에 내리고 있다. 자신의 부모를 포함한 그 외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독립하여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시민적 질서를 지키는 정도에서 상호작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로 연애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상대방과 많은 노력을 기울여 관계의 나무를 키워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애를 한다는 것은 각본상으로는 사랑이 저절로 되는 것처럼 되고 있지만 실제 그 연극을 몇 차례 해보게 되면 당사자들은 그 각본의 이상형을 변형시킬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즉 연애 과정에서는 상대방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함을 알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봉건적 사회에서와는 다른 차원의 인간 이해를 이루어낼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애인만이 아닌 일반적인 '남'에 대해서 깊이있는 이해를 갖게 된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자신이 내린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익히게 된다.



그러나 그 각본을 수입하는 입장에 있는 한국과 같은 제 3세계 경우는 일상적 삶의 토대와 기존 각본이 서로 어긋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다르게 수용된다. 제 3세계의 경우는 경제적 조건의 변화, 특히 경제적 자립이라는 기본적 조건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낭만적 사랑이 수입되었고, 따라서 그 각본은 매우 다른 의미로 읽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제 3세계에서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이 급격히 퍼져나가게 된 근저에는 아마도 뿌리뽑힌 사회의 문화적 허함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 3세계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낭만적 사랑과 연애결혼에 대한 집착은 산업사회적 물적 조건의 변화와 어우러져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급격히 붕괴되는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나온 도피적이고 졸속한 대응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사회생활 과정에서 상투성과 피상성이 짙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연애를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를 독립적으로 세워가고 새로운 관여적인 관계를 키워가는 과정으로 삼기가 무척 어려운 조건 속에 살고 있다. 연애결혼을 한 이들도 여전히 부모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한 부모대의 봉건적 관계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 그 질척한 관계망 속에 매몰된 채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집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연애를 하더라도 새롭고 진정한 체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스스로 새로운 관계를 맺고 키워감으로 얻게 되는 성취감이나 적극성을 기르는 훈련의 기회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대부분의 연애가 소모적인 관계, 소설가 최수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치욕'이나 '죄의식'의 기억에서 끝나는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설혹 결혼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새로움을 창출해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실로 엄청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앞에서 본 봉건, 근대와 탈근대적 현상들이 마구 뒤섞여 나타나는 혼재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 혼란을 정리해 갈 틀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각 세대는 자신들이 풀어내었어야 할 과제를 풀지 못한 채 다음 세대들의 삶에 자기 식대로 관여를 하고 있으며 이로써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이루어내야 할 문화적 단절, 즉 '봉건'과 '식민시대'로부터의 단절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어떠한 처방을 내리고자 하지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손쉬운 처방, 해답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도그마일 것이다. 우리는 억압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시대, 우리 문제를 풀어줄 신이나 영웅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제 자기상실,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연애를 더 이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자. 이성간의 폐쇄적 공간에 가두어버린 사랑을 해방시켜 우리는 상대방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우정을, 인정을, 정을 다시 찾고 거기에서 나오는 새로운 에너지로 공동체적 회복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고 성해방은 이 시대의 새로운 억압적 언설(言說)에 지나지 않으며, '성'의 외침이란 인간 본능의 외침이 아니라 더욱 도식화된 상호작용의 한 형태일 뿐임을 분명히 하자.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가 서로의 자람에 참여하는 관계, 열린 만남을 북돋우는 사회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 충실한 우리들의 각본을 만들어가야 한다.



결혼, 사랑, 그리고 성 :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각본들, 또 하나의 문화, 조한혜정(1991)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색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