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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진 Oct 12. 2020

새로운 세계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이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 경험은 어떤 지형, 맥락, 관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일회적 사건이라 해도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떤 연속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는 일이 그저, 그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이 또한 확신이 아닌 막연한 생각) 나의 삶에서 겪는 특별한 경험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 일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줄, 그 세계가 이렇게 넓고 광활하며 새롭게 배우고 익혀야 할 일들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그려보지 않았다. 상상력의 부족이었을까? 교육의 부족이었을까?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보고 들어도 모르는 것이구나, 느꼈었다. 물론 겪는다해도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되었을 때, 한 자리에 누워서 자다가 깼다가 먹다가 싸다가 할 그 때쯤, 나는 어떻게든 나만의 시간을 사수하고 싶었다. 아이가 잠들었을 때 밖으로 나와 책을 보고 공부하며 이전과 끊임이 없는 삶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꺼도 계속 울리는 알람처럼 아이는 내가 방 밖으로 나와서 내 시간을 즐길라 칠 때쯤 엥~ 하고 울었고, 한숨을 푹 쉬며 들어가서 겨우 재우고 나오면 또 울었다. 수면 교육이라고 아이가 어릴 때부터 방에서 혼자 잠을 자도록 교육을 시키는 이론이 있다는 걸 알고 책을 두 권 정도 사서 봤었다. 이 교육만 성공적으로 된다면 나의 시간을 좀 오래도록 가질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그 책 중 한 권의 책을 펼쳤을 때 봤던 문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Welcome to Mother's World.”  


너무 낯설었다. 엄마의 세계라니. 내가 이 세계로 들어온거란 말인가? 솔직히, 엄마의 세계로 오신것을 환영한다는 말에 호응하기가 싫었다. 나는 내 삶이 있다. 그것이 나의 세계고 아이는 내 세계 안에서 겪은 특별한 이벤트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굳이 왜 엄마의 세계로 가야 하는건가? 나에게 있던 것들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허리와 목을 뻣뻣히 새운 모냥새였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의 ‘엄마’가 처한 현실이 나를 더 뻣뻣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빼박 희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던 일 다 접고 아이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엄마의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게 이벤트가 아니었다는 게 시간이 지날 수록 명확해졌다. 아이는 누워만있다가, 기었고 걸었고 뛰었다. 그것은 행동 반경이 점점 넓어진다는 것이고, 그만큼 나의 행동 반경도 커졌다. 누워있을 때는 팔을 흔들고 다리를 차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면, 뛰어다닐 때는 놀이터 모래사장을 헤집고 다니는 행동을 했다. 집 안에만 있던 아이가 사회의 다양한 기관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그만큼 내가 할 일이 늘었고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이벤트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와 기간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길었다. 물릴 수도 관둘 수도 없는 끝나지 않는 사건. 이건 정말로, 새로운 세계였다. 내가 아무리 엄마의 세계를 거부해도, 나는 피할 수 없는 엄마였다. 아이 일로 어디를 가면 나는 무조건 '누구 엄마’였다. 그 상황에서 난 누구 엄마가 아니라, 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것일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듯 이전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공고한 세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삶에서 하는 수많은 경험이 어떤 세계로 이어진다면, 그 세계는 서로 겹쳐지거나, 접합되거나, 분리되거나 하며, 끊임없이 분열했다 합쳐졌다 터지다 하는 비누거품 같지 않을까? 삶이 아무리 비누거품처럼 견고하지 않은 모양새라해도, 결국 중요한 건 살아있는 지금이니까.  


언어는 어떤 상황이나 대상을 규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여전히 엄마 (혹은 아줌마)로 불리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다만 그 불편함은 전통적인 사고, ‘엄마’라는 대상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에 대한 거부감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거부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계들과 오늘을 즐겁게 살고 싶은 마음 뿐...!   ( ...의 의미 = 물론 쉽진 않지만)



20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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