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PA Apr 10. 2024

고향이 없어서 고향을 만들어보았습니다

[노파의 글쓰기] 홈리스의 고향 만들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서울 사람들에겐 고향이 없다고들 합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곳, 언젠가는 늙고 병든 몸으로 돌아가 안길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젊을 땐 기를 쓰고 도시로 올라와 아득바득 겨우 자리 하나 마련하며 살다가 나이 들면 적당한 때에 정리하고 돌아가야 순리일 것 같은데, 그래야 젊은 날의 고생도 견디어질 것 같은데, 서울 사람들에겐 그게 없습니다.


서울 사람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평생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아등바등 살다가 도시 빈민으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도시인들에게 고향은 저승인 걸까요?


그것이 무척 쓸쓸하게 느껴져 저는 고향을 하나 만들기로 했습니다. 마흔을 앞두고 보니, ‘아는 시골’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선원에 가보았습니다. 노년의 여성이 시골에서 홀로 기거하기에는, 아무래도 가스총 하나로는 부족한 듯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모인 곳 옆에 기생하기 위함입니다.


선원은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는 길이 험하지는 않습니다. 험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척 편안합니다. 여정의 70%를 지하철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경의선을 타고 회기역까지 70분을 가서 그 자리에서 경춘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80분을 이동합니다. 그리고 40분을 기다렸다가 하루에 네 번 있는 마을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올라가면 끝!


기다리는 40분도 황량한 강촌역 느티나무 쉼터 아래 앉아서 집에서 싸온 호밀빵과 커피를 오물오물 먹고 있으면 금방 지나갑니다. 물론 편도만 4시간 40분이 걸리는 작은 단점이 있긴 합니다.



사실 오가는 데만 9시간이 넘게 걸리다 보니, 이동 시간을 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이 여행은 못합니다. 지하철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여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섯 시간 동안 지하철에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이마트 쇼핑을 하고, 차창 밖 풍경을 넋 놓고 보다가 다시 책에 집중하면 정말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갑니다.


워낙 시선을 뺏기는 일이 많아서 가져간 책을 절반도 읽지 못하지만, 그래도 역시 책은 있어야 합니다. 뭐랄까, 그래야 여행에 품위가 생긴달까요? 훗.


요즘 다들 벚꽃을 쫓는 모험을 하시길래 저도 어제는 하루키의 “양을 쫒는 모험”과 함께 했습니다.


읽으면서 또 한 번 느꼈지만, 하루키는 정말 문장도 기발하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취향은 아닙니다.


자기가 뭐하는 지도 모르는 녀석이 주인공으로 나와 여자가 뭘 하고 사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이혼을 하고, 자살을 하니 조문을 가고. 아.. 정말이지 퇴폐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저 역시 제멋대로 사는 편이지만, 하름스의 인물들은 쿨몽둥이로 시원하게 찜질을 해주고 싶습니다. 쿨몽둥이는 앞에 크게 COOL이라고 쓰인 몽둥인데, 쿨병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는 물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대로 맞으면 한 방에도 완치된다고 합니다.

 


쿨몽둥이를 휘두르는 상상을 하다 보니 그새 선원에 도착했습니다. 어제가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첫 번째 왔을 때 경험한 그 침묵, 무관심, 냉대가 많이 훼손됐기 때문입니다.


이곳저곳에서 스님과 행자들이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고, 외부인의 등장에 힐끔힐끔 쳐다봤으며, 그 와중에 선원장 스님도 계셨습니다. 2년 동안 팟캐스트로 목소리만 들어오던, 제 적막한 일상을 낭랑한 경상도 사투리로 밝혀주던, 바로 그 스님입니다.


마치 연예인을 본 듯한 기분이었으나 저는 낙타처럼 어색하게, 자세히 보아야 인사한 걸 겨우 알 수 있는 쭈뼛한 묵례를 하고선 잰걸음으로 법당 안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일부러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닌데, 제게는 그냥.. 좀바보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을 어려워하는 마음, 유명세가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않다는 치기, 빈집인 줄 알았는데 집주인을 마주친 데 대한 당황함, 그리고 불편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회피 심리,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쟨 뭐야?’ 같은 행동을 하곤합니다.


죄송합니다. 사회성이 부족한 탓입니다. 다음부턴 낼모레 마흔답게 정확한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고향’으로 삼기 위해서는 이런 불편함은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입니다. 집주인과 안면을 트고 이곳에 자주 얼굴을 비추면서 사람들에게 조금씩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빵이 있을까를 기대하며 휴게실에 들어갔을 때 그분들, 절에 가면 제일 먼저 호구조사를 한다고 알려진 개량 한복의 그분들이 계셨는데도 꾸역꾸역 들어가 앉았습니다.


다행히 이곳은 묵언이 규칙이라 누구도 제게 말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저 혼자 안절부절못하여 (빵 먹어야 하는데.. 하면서)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법당에 다시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이번엔 법당에도 누군가 들어왔습니다. 그 누군가는 조용히 제 뒤쪽으로 와서 방석을 깔고 앉았는데,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너무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살짝 눈을 떠서 보고 싶지만,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더 불편해질 것 같아서 억지로 궁금증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기침이 하고 싶고, 코도 훌쩍이고 싶고 갖은 예민한 증상이 뻗치고 올라와 결국 쥐처럼 법당을 빠져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제겐 대인기피증이 있는가 봅니다.


그리고 휴게실로 도망쳐갔는데, 마침내 비어있었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해간 텀블러를 꺼내어 천천히 물을 끓여 차를 우려 마셨습니다.


아.. 행복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도착한지 세 시간 만에 누리는 행복입니다. 남의 집에 와서 이토록 아무도 없기를 바라다니 저는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기적의 물이 담긴 텀블러입니다


차를 얻어 마신 값으로 바구니에 키세스 초콜릿을 한 줌 넣어두었고 빵 도둑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초코파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현명하게 빵 도둑을 퇴치하다니,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번엔 일찍부터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까 본 개량 한복 선생님이 따라나오시길래 잔뜩 긴장했습니다. 저의 호구에 관해 아무것도 얘기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버스타고 오셨나봐요?” 한 마디 던지고는 길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올라와서는 “버스 곧 오겠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곤 다시 선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선생님은 버스가 올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내려가 봤던 겁니다.



무심을 가장한 다정함,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애정입니다.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또, 다른 고향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데 안도를 느끼며 저는 뒤뚱거리며 올라온 버스를 탔습니다. 기사님도 저만큼이나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빈 차로 갈 줄 알았는데 타셨네! 꽉 잡으세요 (씨익)”


그리고는 50분간 죽음의 곡예 운전을 선보였습니다.

“이런 데 버스가 다니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밤에는 저도 무서워요” 하며 기사님은 굽이친 내리막길을 더욱 신명 나게 밟아댔습니다.


저는 이미 옆자리에 와 있는 것 같은 저승사자에게, 오늘은 아니라고, 제가 그 정도로 업보를 쌓진 않았다고 애걸했습니다.


함께 탄 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내기는 다 했냐, 딸내미 포장마차는 잘 되냐, 하며 하하 호호 담소를 나누는데 오직 저만이,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내 고향 남쪽은 다정과 스릴이 넘치는 곳인듯 합니다.


중경삼림의 그 양조위입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409220469

#노파의글쓰기 #어느날글쓰기가쉬워졌다 #글쓰기 #글잘쓰는법 #노파 #김수지작가 #에세이 #문해력 #어휘력 #북스타그램 #책리뷰 #서평 #감성글 #중경삼림 #양조위 #내고향남쪽 #선원 #시골버스 #절 #개량한복 #보살님





매거진의 이전글 <패왕별희> 여섯 번째 손가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