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다음엔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하룻밤 사이의 해프닝처럼 끝나서 정말 해프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을 뿐이다.
군인들은 결코 설렁설렁 움직이지 않았고, 국회 창을 깨고 들어가 물리력을 사용했고, 당대표와 국회의장을 체포하려고 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당 당대표 사무실 문을 부쉈다.
국회의원들이 비상계엄 선포 2시간 만에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할 수 있었던 것은,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군인의 차를 막고 군경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의원들을 안으로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보좌진들이 국회 곳곳에서 의자와 가구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군인들의 진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으면서까지 국회로 들어가 표결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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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여당 의원들은 18명을 제외하고는 자기네 당사에 모여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그들은 뭘 기다렸을까? 아마도 계엄군이 국회에서 의원들을 전부 폭력 진압하고 체포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아마도 윤석열은 이번 계엄령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충암고 출신 군인들을 요직에 앉히고 계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3개월 전부터 나돈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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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비상계엄은 정말 성공할 수 있었다.
지난 총선 때 민주당이 의석수 과반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시민들과 보좌진들이 군인들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여당 대표와 국회의장이 체포됐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 이곳에서 알게 됐을 것이다. 개머리판으로 시민들 머리를 깨죽이고, 지나가던 여자들을 강간하고 신체를 훼손해서 살해하는 그 짓을, 지금 서울에서 보게 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엄 군인이 제1야당 대변인을 향해 분노에 차서 총을 겨눴기 때문이다. 대변인의 부끄럽지 않냐는 외침에는 ‘어, 안 부끄러운데?’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젊은 남성들이 군대에 많기 때문이다.
군대 밖에도, 윤석열의 계엄을 비판하기보단 그 대변인의 홈페이지로 몰려가 군인 총에 손을 댄 멍청한 x, 차라리 총 맞아 죽었어야 했다는 등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비상계엄이 벌어지면 나가서 페미들을 전부 죽이겠다는 글이 인터넷에 우후죽순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계엄이 현실이 됐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젊고 건강한 남성들 중 일부는 실제로 나와서 폭행과 강간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지지를 받는 윤 정권은 범죄를 못 본 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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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명령을 받는 대로 따르는 이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도, 계엄 동조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말일뿐이다.
1980년 광주에서도, 어떤 군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엉뚱한 곳을 사격했고, 여순사건 때도 군인들은 시민들을 죽일 수 없어 항명했다.
어제 국회 앞에서도, 어떤 군인은 항의하는 시민을 힘으로 바닥에 패대기쳤고, 다른 군인은 그 시민을 일으켜 세우고는 등을 토닥여줬다.
총구를 적이 아닌 자국민을 향하게 했을 때, 군인들이 보이는 행동은 전부 자기 선택의 결과다. 자기가 선택해서 시민을 조준하고 폭행하고 죽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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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계엄령 속보를 듣고 국회로 달려나간 사람들에게 정말 큰 빚을 졌다. 그 사람들 중엔 당연히 젊은 남성들도 많았다. 정말이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군경을 맨몸으로 막고 싸워서 이룬 평화와 안정을 어떤 사람들은 악의와 혐오로 가득한 말을 내뱉는 것으로 누린다.
기껏 목숨 걸고 신군부와 싸워서 투표권을 찾아왔더니 사람들 다수가 노태우를 뽑았던 것처럼,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다음 선거에서 또 보수정당을 찍을 것이다.
잘 보고, 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오늘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운이라는 게 얼마나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인지를.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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