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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씨 Nov 07. 2023

사서가 할 일

11월은 이 달의 행사와 희망도서를 접수하여 2023년 세 번째로 들일 도서들을 선정하고, 12월 행사와 축제를 준비하며 동아리 수업을 진행하면 된다. 내 계약조건에 있는 일들이다.


8개월여 일하고 보니, 물론 정기적이고 눈에 보이는 행사나 수업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종이 땡치면 도서관으로 달려오는 단골고객에게 어떤 따스함과 경험을 줄 수 있을까, 가 새로운 고민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 교회에서는 다니엘기도회가 절찬리 진행 중이다. 그곳에서 들은 간증이 이 세상의 "땅끝"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었다. 간증의 주인공은 고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가해자의 아들이었다. 손 목사님은 가해자의 아들을 용서하고 양자로 들였고 전도사 과정을 밟게 했다고 한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았더니 손 목사님의 뜻을 받들어 세계의 끝 나라에서 한센병을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자리에서 땅끝은 어디일까. 나는 너무 내 밥그릇에만, 내 안위만 괜찮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도서관에 자주 오는 참새들 중에는 덩치가 크고,  두 눈을 훌쩍 가리도록 곱실거리는 앞머리를 늘어뜨리고, 한쪽 눈은 사시인 아이 A가 있다. 도서부원 한 명과 친해서 데스크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걸 보고 듣고 했었지만, 내가 직접 대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한 방향으로 고집스러운 대화를 이어가기도 하고, 과한 자의식이 있었고, 무언가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아이였다.


오늘은 친한 도서부원이 없었고, 나는 다른 도서관 참새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옆으로 슬쩍 끼어든 그 아이를 반기자 기쁘게 대화에 참여했다. 이번주는 미니토론을 진행 중이다.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 된다."에 대한 찬반 의견을 적으면 간식을 주는 이벤트인데, 자신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단다. 주말이면 밤을 꼴딱 새우고 낮에 자는 패턴이기 때문에 늦잠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빈 속에 카페인 과다 복용한 경험담도 들려주었다.


"몬스터 3개를 마시고 잠이 안 와서 시험 진짜 잘 봤었어요!"


"몬스터가 뭐야?"


"카페인 음료요! 그거 마시면 잠이 안 와요."


옆에 있던 또 다른 아이도 거들며 포카리스웨트와 박카스를 섞어 마셔도 진짜 잠이 안 온다는데, 본인은 안 먹히고 잠만 잘 잤다고 했다. 카페인에 이어 부모님이 권해서 함께 마셔본 음주 경험담까지 이어졌다. 어디까지 경험해 보았나 배틀하듯이 이야기하던 아이들 중 A는 호기심이 많아 술도 종류별로 마셔봤지만 쓰기만 하고 맛이 없다고 했다. 담배도 궁금해서 관련 책을 보고 계속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담배 피우겠는데?"


라고 은근히 떠봤더니, 심장 수술을 했기 때문에 피우는 즉시 죽는 난다.


"아... 아팠었구나...."


A양은 친구가 없어 보였다. 도서부원 친구가 받아주어 늘 도서관에 그 아이와 이야기하러 오는 듯했고, 그 둘은 게임 이야기와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를 했다. A는 한 여가수의  7년간 팬이었는데 앨범은 한 장도 사지 못했다고 했다. 도서부원 친구가 한 명 더 있긴 했다. 그 친구와는 거친 말이 오가며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한동안 같이 다니지 않아 싸웠나 보다 했는데, 화해했는지 요즘 다시 독서동아리를 하러 함께 온다. 그 외에 친구가 없나 보다 하는 건, 쉬는 시간에 잠이 들었는데, 친구들이 아무도 깨워주지 않고 다른 교실로 가버려서 수업 하나를 늦었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안 깨워주냐는 내 놀란 반응에 원래 그랬다는 듯 무던하게 "네"할 뿐이었다.


A양은 사람의 인체가 적나라하게 그려진 드로잉 책을 즐겨 읽었다. 그림을 실제로 그리는 것은 보지 못했으나, 그림 그리기용인지 관찰용인지 궁금했다.




나의 '땅끝'은 지금의 이 자리에서부터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미떼 코코아 한 통을 가져왔다. 점심을 거르고 오는 도서관 참새들에게 한 잔씩 타줄까 해서다. 한 명은 씹는 거가 더 좋다 해서 교장선생님께 받은 간식을 주었고, 다른 참새 A양이 도서관 문 밖으로 보이자 반갑게 손을 흔들어줬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던 그녀가 '독서왕 클래스'에 참여하기 위해 어제 책을 3권 빌려갔었고, 미션지를 제출하러 오던 길이었다. 행운의 뽑기 1회권이 그녀에게 주어져 하나를 뽑았는데,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선생님!!!!!!!!!!!!!!!!!" 한다.


"왜 왜 무슨 일이야!!!!"


"저,,,,,,,,1등이에요!!!!!!!!!!!!!!!!!!!!!!!!!!!!!!!!!!!!!!!!! 어떻게 저에게 이런 일이!!!!!!!!!!!!!!!!!!!!!!"


"어머나 세상에!!!!!!!!!!!!!!!!!! 축하해!!!!!!!!!!!! 거봐, 열심히 참여하면 이런 날이 온다니깐~~!!!! 축하해!!!"


그녀는 여태껏 보지 못한 신나는 얼굴로 책을 세 권 더 빌려갔다. 책 빌릴 맛이 난다나?



도서관의 역할은 책 읽을 맛, 책 빌릴 맛, 편안한 맛이면 딱 좋지 않을까. 그게 나의 일이고 '땅끝'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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