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la Feb 01. 2016

폭설과 성스러움

35년 만의 기록적인 한파가 만들어준 인연


#20 폭설과 성스러움: 
35년 만의 기록적인 한파가 만들어준 인연



하필이면 우리가 여행 갔을 때 이런 일이 터졌다. 

기온이 0점 아래로 떨어져 본 게 무려 35년 전이란다. 35년 만에 찾아온 영하의 날씨, 그리고 폭설. 기상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890년 이래로 이보다 추웠던 적은 단 3번밖에 없다. 제주도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규슈 사가현 이야기다.

    

제주에 사람들이 발 묶여 오도 가도 못했던 지난 1월 24일, 같은 위도 상에 있는 규슈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한국행 비행기는 뜨지 못했다. 사가 공항이 활주로 결빙으로 폐쇄됐기 때문이다. 간선도로 대부분의 차량 운행이 통제됐고 기차도 버스도 운행을 중단했다. 눈 구경하기 어렵다는 규슈에,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틀 전이었던 1월 22일,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 바라본 하늘은 심상치 않았다. 착륙하는 내내 구름 속이었다. 지난 12년간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늘 창가 자리를 고집했던 난데, 그런 내 눈에도 이렇게 두꺼운 구름층은 처음이었다. 한참을 뚫고 내려간 뒤에야 부슬비가 내리는 사가 공항 활주로에 도달했다. 공항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끝이 안 보이는 먹장구름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오후 네 시인데도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2016년 1월 22일 구름 낀 사가공항 상공

    

날씨가 궂을 거라는 건 여행 준비를 하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출발하기 일주일 전부터 매일 같이 현지 날씨를 체크했는데, 번번이 짜증이 났다. 단 하루라도 맑을 예정인 날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기 공모에 뽑히면서 받았던 무료 숙박권의 유효 기간이 1월 말까지였기 때문에 휴가를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여행지에서 우산이나 쓰고 다니게 생겼군. 툴툴거리며 제일 작은 3단 우산 하나를 캐리어에 챙겨 넣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때만 해도 우산을 쓸 수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안 했다. 강풍주의보 때문에 우산을 차마 펴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했으니까.

   

간간이 오던 부슬비는 23일 기온이 떨어지면서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다행히도 낮 동안에는 아주 조금씩만 내렸다. 밤이 되자 살짝 눈발이 굵어졌지만 펑펑 내리는 싸락눈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행 이틀째까지 생각보다는 날씨가 양호하다며 호텔방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그리고는 별 걱정 없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여행 마지막 날인만큼 더욱 부지런히 나갈 채비를 했다. 준비에 여념 없는 나를 뒤로 하고 남편이 무심결에 창 커튼을 젖혔다. 남편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름이 가득 낀 어두운 하늘 아래로, 땅에는 하얗지 않은 물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온통 눈이었다.


계획해둔 일정을 소화하고 공항까지 가려면 넋 놓고 있을 짬이 없었다. 눈까지 오고 있으니 기동력은 더 떨어질 터, 우리는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제주도 해변과 닮은 현무암질의 바닷가를 품고 있다는 하도미사키 곶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제주도에서 기증했다는 돌하르방의 뒤태를 보는 순간, 웃기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신경 쓰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가보기로 계획한 곳 중 단 하나라도 제외시키기가 아쉬웠다. 


절벽 가장자리에 있는 하트 조각상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몸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휘청였다. 눈은 위에서 내리고 있지 않았다. 옆에서 볼을 때렸다. 조각상까지 50m 정도 남겨둔 상황, 우리는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외투부터 바지까지 왼쪽에만 눈이 하얗게 덮였다. 이런 거센 바람은 처음이었다. 그날 강풍주의보가 내려졌었다는 사실과, 우리가 맞은 그것이 초속 10m의 강풍이었다는 사실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알았다.


10m/s의 강풍이 만들어낸 현해탄의 거친 파도


‘바닷가라서 바람이 유독 셌던 거겠지.’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일본 3대 아침 시장이라는 요부코 시장이었다. 연중무휴라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갔는데 한 두 가게만 겨우 문을 열었을 뿐 기대했던 시장의 풍경이 아니었다. 내려 보지도 못하고 차를 돌려야 했다. 어째 계속 조짐이 안 좋았다.

   

너무 장사가 잘 돼서 전화 예약도 안 받는다는 유명한 식당도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눈 때문에 영업을 안 한단다. 짧은 일본어 실력과 손짓 발짓을 동원해 대화를 하는데, 가게 직원이 구사하는 단어가 조금 이상했다. 눈은 일본말로 유키인데, 유키라고 하지 않고 ‘오’유키라고 했다. 일본어에서는 단어 앞에 ‘오(お)’를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경어체로써 사용된다. 차 한 잔을 대접할 때도 ‘오차(お茶)’라는 말을 쓰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눈에도 ‘오(お)’를 붙이는 건가 의아해하며 그 식당을 떠났다.


마른눈이라 많이 쌓여도 크게 미끄럽진 않을 것 같다며 운전하는 남편을 안심시켰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눈은 그칠 줄을 몰랐고, 다음 목적지인 산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울퉁불퉁 시골길이었다. 좀처럼 속력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낮은 경사의 오르막만 마주쳐도 차는 속수무책이었다. 계기판의 미끄러짐 제어 장치 표시등에 계속 불이 들어왔다.


차체 자세(미끄러짐) 제어 장치 표시등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두 갈래 길이 나올 때마다 무조건 내리막만을 택했다. 산 전망대는 포기했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무조건 내려만 갔다. 굽이굽이 인적도 차도 없는 시골의 도로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계속 잡아먹고 있었다. 급기야 일이 터졌다. 전방에 2km 정도의 오르막길이 나타난 것이다. 다른 길은 없었다. 무조건 그 길을 빠져나가야만 공항 가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중턱에서 미끄러졌다. 액셀을 밟을수록 차는 뒤로 밀렸다. 오르막길의 시작 지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번에는 중턱도 못 가서 멈춰버렸다. 바퀴 헛도는 소리가 굽이치는 언덕에 울렸다. 세 번째, 네 번째 시도도 무위로 돌아가자 남편은 이를 악물었다. 길가 옆 벼랑으로 혹시나 차가 미끄러질까봐 속력 내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 시도하면서 남편은 시작 지점부터 힘껏 액셀을 밟았다. 차는 굉음을 내며 오르막길을 내달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지가 바로 앞이다. 마지막 급경사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바퀴가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헛돌았다. 차가 멈췄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차올랐지만 꾹꾹 삼켰다. 이런 날씨 속에도 계획한 일정에 미련을 못 버렸던 나를 남편은 얼마나 원망할 것인가.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매몰차게 눈을 뿌려대는 하늘이 밉고 또 미웠다. 나는 뒤에서 밀어보겠다며 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미안함을 만회하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단 1cm도 움직이지 않는다. 차는 오히려 계속 뒤로 밀릴 뿐이었다. 남편은 나보고 비켜서라고 했다. 남편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액셀을 밟는데 갑자기 차가 옆으로 기울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자로 서있던 차가 ─자로 미끄러지며 길 옆 낭떠러지로 몰리고 있었다. 남편이 눈앞에서 아득히 멀어져갔다. 나는 “안 돼!”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얀 눈길 위에는 우리 차바퀴가 남긴 무수한 S자들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벼랑에서 간신히 벗어나 중턱까지 다시 내려온 우리는 비상등을 켜고 망연자실 길 위에 차를 세웠다. 이렇게 조난당하는 것일까. 빠져나가려 할수록 더욱 깊이 곤두박질치고만 있었다. 길은 빠르게 얼어붙어갔고, 그럴수록 우리의 희망도 차갑게 식어만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뒤에서 차 한 대가 오는 게 보였다. 남편이 미안하다는 표시로 한 손을 들며 지나가라고 했지만 웬일인지 그는 속도를 줄이더니 우리 차 옆에 멈춰 섰다.


 “다이죠부데스까?”


삼십 대 남자였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괜찮냐며 묻는 그에게 우린 “구루마 빙글빙글”, “위 돈 해브 체인” 등 국적 짬뽕의 언어와 몸짓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주변에 체인을 구할 곳이 없는지 묻자 너무 시골이라 전혀 없다며 그는 난감해했다. 이윽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며 긴 통화를 한다. 경찰에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도로 사정으로 경찰차도 이 산간까지는 못 온다는 것 같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그는 몹시 미안해하며 쉽게 우릴 떠나지 못했다. 좁은 산길에 차를 무작정 세워놓고 있는데,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우리에게 그가 보여준 선심은 정말 뜻밖이었다.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그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가 떠나자 내 마음속에서 용기 같은 것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나, 근처 민가에 도움을 좀 청해봐야겠어.”

 “뭐라고??”     

남편은 놀라 되물었다. 도와달라고 해봐야 무슨 수가 있겠냐고도 했다. 나도 몰랐다. 다만 한 일본인이 베푼 따뜻한 호의가 다 내려놓았던 희망을 다시 품게 만든 것만은 분명했다. 할 줄 아는 일본말을 급히 떠올려 대충 이어 붙여보았다. 오르막길 초입에 몇 채의 민가가 있었고 나는 그중 한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스미마셍.”

그러자 안에서 희미하게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마떼 구다사이.”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중년의 아주머니였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고멘나사이. 와따시와 칸코쿠진데스. 니홍고가 나이데스. 구루마가 스톱푸. 타이어 체인 아리마스까?”     


갑작스레 찾아온 한국인이 엉망인 일본어로 차가 멈췄다며 체인이 있느냐고 묻는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참 난데없고 난감할 터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다시 그녀에게 매달렸다.


 “렌타카 오피스 뎅와 오네가이시마스. 혼또니 고멘나사이.”     

렌터카 사무소 전화번호를 보여주며 부탁하자 그녀는 알겠다며 전화를 가져왔다. 어차피 우리의 일본어 실력으로 전화 통화는 무리이므로, 그녀에게 대신 통화를 부탁했다. 그녀는 현관이 춥다며 우리에게 방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했다. 사양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도조(부디)”라며 손으로 연신 안을 가리켰다.     


방 안에 들어가니 고타츠(탁자 난로)를 가운데 두고 식구들이 동그랗게 앉아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주머니의 아들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할머니는 눈이 동그래져서 놀라며 우리에게 일본어로 계속 말을 건넸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이런 시골까지 어떻게 왔느냐, 생전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건 처음 본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 말씀에 TV로 시선을 돌리니 화면 왼쪽이 온통 파랗고 그 가운데 선명한 흰 글자 네 개가 자막으로 떠 있었다. 大雪警報(대설경보).


그제야 나는 알았다. 식당 직원이 유키가 아닌 ‘오유키’라고 했던 이유를 말이다. 경어체로 쓴 것이 아니었다. 이날 우리를 하루 종일 악전고투하게 만든 이 눈, 이게 그냥 눈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설’이었다. 항공사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인천행 TW296편은 공항폐쇄(기상악화)로 결항되었습니다.”




중간에 잠시 안 되는 일본어로 나도 렌터카 회사 직원과 통화를 했다. 견인차를 불러주면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말을 하고는 아주머니께 전화를 다시 넘겼다. 아들이 슬그머니 방 바깥으로 나가더니 밖에서 아주머니와 한참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걱정스럽고도 죄송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들이 털모자에 장갑까지 갖춰 끼고 뭔가 비장한 모습으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손끝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체인이었다.


아들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체인을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다고 했다. 체인은 아주 구식 모델로, 케이스에 내려앉은 먼지가 그것이 사용된 적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그들은 직접 설치까지 해주겠다며 우리보다 앞장서서 밖으로 나섰다. 도리어 우리에게 추우니 집 안에서 기다리라고까지 했다.


눈 내리는 추운 길가에서, 체인을 설치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우리 네 사람은 무릎을 꿇고 앉아 체인과 씨름을 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설치는 했지만, 갑작스레 들이닥쳐 이런 수고를 끼친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아주머니의 손이 추위 때문에 빨갛게 얼어붙어있었다.


조금이라도 사례를 하고자 실례인 줄 알면서도 돈을 건넸지만 아주머니와 아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빨개진 아주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데, 아주머니께서는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키요쯔케테.”


이날 쭉 참았던 눈물이 순간 왈칵 터져나왔다. 민폐만 잔뜩 끼치고 가는 우리에게 조심해서 가라니. 얼어붙은 길 위에 이렇게 칼바람이 부는데, 그 와중에 이 고생을 하게 만든 나쁜 우리 둘에게 바싹 마른 손과 입술로 건넨 그 말이라니. 헤어질 때 흔히 하는 인사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그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생명의 은인이었고, 앞으로 살면서 어떻게 해도 이 은혜는 다 갚을 길이 없을 것이었다.


추위 때문인지 내가 울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주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아들은 잘 설치해서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남편에게 체인 케이스를 건넸다. 렌터카 사무소에 얘기해뒀다고, 케이스를 함께 가져가면 렌터카 업체에서 그분들의 집까지 택배를 부쳐 보낼 것이라는 이야기임을 대강 알아들었다. 우리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체인을 단 차는 마지막 급경사를 가까스로 꾸역꾸역 올라 넘어섰다.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차를 제 시간에 반납하고 렌터카 회사 직원에게 체인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했다. 빌려주신 분들의 집주소를 전달했고, 꼭 돌려주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 렌터카 사무소를 나섰다.


기차도 고속버스도 모두 운행을 중단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에 나섰던 호텔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항공사에서는 대체편으로 다음날 아침 후쿠오카 공항발 비행기를 안내해왔다. 기차역으로 가서 역무원에게 내일 기차가 정상 운행할지를 물었지만 장담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졸지에 하룻밤을 일본에서 더 보내야 했다. 불안함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나는 짐을 싸고, 남편은 혼자서 기차역으로 갔다. 천만다행으로 기차 운행이 부분적이나마 재개되었다. 우리는 후쿠오카 공항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선로에 쌓인 눈 때문에 기차는 한 시간 이상 지체되었지만, 우리가 워낙 새벽 일찍 서둘렀던 덕택에 무사히 비행기를 탔다.


기차역 전광판에 뜬 새벽 6시1분 후쿠오카 공항행 열차. 붙여둔 종이에는 "눈 때문에 미끄러우니 주의하라"고 적혀있다.


낙담한 순간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있었다. 암담한 순간 우리가 내민 손을 잡아준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의 불길했던 여행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바꿔준 이들이다.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 고마움이다. 반드시 꼭 다시 찾아갈 것이다. 그래도 다 보답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절박함과 간절함은 실상 우리 몫이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박하고 간절한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의 불편을 기꺼이 감당하며 우리를 도왔다. 그건 우리에게 구원이었다. 

폭설이 날리던 일본,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런 성스러운 이들을 만났다.  






Mila의 또 다른 여행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https://brunch.co.kr/@mila/1


https://brunch.co.kr/@mila/10


https://brunch.co.kr/@mila/17


https://brunch.co.kr/@mila/18


매거진의 이전글 내 생애 가장 극적인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