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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바라 Jul 11. 2020

서른 두 살, 신입 편집자 분투기

그리고 4개월만에 포기

조용한 사무실 한 구석 야마하 라디오에서는 음악 방송이 흘러나온다. 영화 겨울왕국의 열기가 뜨거워서, 라디오 프로그램 DJ들은 하루종일 겨울왕국 OST를 틀어댔다.


전직원 10명 남짓인 출판사. 결혼하고 32살에 신입 편집자로 입사한지 3개월.


경력이 전혀 없는 신입으로 입사했는데, 선배 편집자가 다 퇴사하고 한 명도 없었다. 편집팀이라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와 같은 날에 입사한 B, 그리고 편집장과 나 이렇게 셋이었다. 정확히는 나와 B가 입사하고 한 달 후, 한 명 있던 선배가 퇴사했다. 인수인계를 이유로 회사에서 한 달만 더 있으라고 붙잡아둔 모양이었다. '연차'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고 퇴근은 거의 매일 밤 10시를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본을 교정교열하는 일은 너무나 좋았다. 전혀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밤을 도 힘들것 같지 않았다. 문장을 다듬는 일은 내겐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문을 바른 문장으로 다듬고 너무 긴 문장은 여러 문장으로 끊었다. 수동태나 피동태는 가능하면 능동태로 고쳤다. 일본식 어투나 번역투, 어색한 문어체를 손질했다. 가끔 번역 자체가 이상한 문장은 통째로 뜯어 고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를 때도 있었지만 잘 참아냈다. "안 그래도 방금 자기 얘기 하고 있었어. 자기 교정 너무 잘 한다고. 확실히 소질이 있어." 어느 날 편집장 방에 들어간 내게 편집장이 말했다.


 로비에 판매 부스를 열기 위해 주말에  행사장으로 출근한 날, 편집장은 나를 강의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리 와. 너 키워주려고 해. 넌 여기서 이 강의 듣고 있어."

 편집장은 신간 기획을 위한 기획 회의에도 나를 두어  참여시켜줬고, 나를 여러 저자와 역자에게 소개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이렇게 보상 받는구나, 싶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집안 사정 때문에, 미래나 적성은 생각도 못해보고 쫓기듯 웹에이전시에 취직했다. 업무는 재미있고 뿌듯할 때도 있었지만, 채워지는 느낌 없이 늘 소비만 되는 느낌이었다.  


 신경성 위염으로 회사 근처 내과를 찾은 어느 날, 병원 대기실에 놓여있던 신문에서 A의 신간 소설집 전면 광고를 봤다. A는 나보다 세 살 많은 엄마 친구 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는 입만 열었다 하면 A의 문학상과 공모전 수상 소식, 상금과 장학금 액수, 그밖에 크고 작은 성과들을 쉬지 않고 읊어댔고, 초등학교 때 글짓기 상만 70개쯤 탔던 나는 소설가라는 꿈을 접고 책과 담을 쌓게 되었다. 크고 작은 문학상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리던 A는 결국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떠오르는 젊은 작가로 입지를 굳혔고, 굴지의 출판사에서 소설집을 출간 한 참이었다. 하필 이런 곳에서 이런 때 A의 책 광고를 만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나를 줌업해서 잡던 카메라 앵글이 점점 멀어져 내가 조그만 점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20대를 웹에이전시와 대형 이커머스에서 보내고 서른 살에, 뒤늦게 출판사로 전직을 준비했다.


밤 10시에 퇴근하고 회사 근처 PC방에서 자정 너머까지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집에 가면 잠이 올까봐서였다.  서른 살이면 작은 출판사에서는 벌써 팀장급일 수도 있겠지. 출판사 대부분이 규모가 작을 텐데 서른 살의 신입은 부담스럽겠지. 이런 현실적인 생각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언젠간 내게 기화를 주는 출판사가 하나쯤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계속 출판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며 지원서를 보냈다. 하지만 단 한 군데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2년 정도 직장을 더 다닌 후, 다시 도전했다. 사설 교육기관에서 교정교열과 출판편집/기획 과정을 수료한 후였다.


결과는 합격.

물론 원래 받던 연봉보다는 적었지만, 신입 편집자로서는 꽤 높은 연봉도 받게 되었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에 굵은 웨이브 펌을 한 40대 후반의 편집장은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런 그녀가 면접 본 그 자리에서 바로 나를 합격시킨한 후 제일 먼저 한 말은, 본인이 Y대 국문과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나를 합격시킨 데는 내 출신 학교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울대 출신이 모른다고 하면 아무도 모르는 거야."

  "저자 약력 봐라. 학부는 없고 대학원만 있다는 건, 학부가 별 볼 일 없다는 거야."

 따위의 말을 할 때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3대째 내려오는 양념 맛의 비법이라도 전수하는 듯 자부심에 가득차 보였다.


  출판사에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누가 마시는지도 모르는 드립 커피를 내리는 방법이었다. 너댓명의 여직원 전부가 동원되어 매일 하루에 몇 번씩 돌아가며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회사에 가끔 사장이나 손님이 방문하면 커피를 수시로 대접해야 했고, 손님이 점심 때 찾아오면 직원들은 점심도 못 먹고 시중을 들었다. 주말에 사장의 개인적인 일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시간 업무 지시와 보고가 카카오톡으로 이루어졌다. 당장 1시간 후에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화장실 다녀 오느라 10분만 대답을 늦게 해도 난리가 났다. 퇴근 후고 주말이고 구분이 없었다.


  우리는 주로 번역가에게 메일을 보내 계약사항을 알리거나 마감일을 알리고, 원서 본문 파일과 이미지를 전달하거나 번역한 원고를 전달 받아 저장하는 일을 했다. 마감 날, 외주 편집자들이 떠들썩하게 몰려와 교열을 마친 파일들을 넘기면, 남아서 파일을 인쇄소에 넘기고 최종 표지 디자인까지 확인하는 것도 우리 몫이었다. 그런 날은 몇 시에 퇴근할지 알 수 없었다. 최종, 최최종, 진짜 최종, 진짜 최최종....이런 파일들이 출판사 FTP에 올라오면 마지막까지 확인하고, 최종 인쇄용 파일까지 나오고 나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번역가에게 보내는 모든 메일의 본문은 정해진 매뉴얼이 있었고 모든 메일엔 경영진이 참조로 들어가 있어 토씨 하나라도 마음대로 바꿔 보낼 수 없었다. 메일에 오타가 있거나 단어 선택이 경영진 마음에 안 들거나 받은 메일에 답장을 바로 안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직장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마감일을 못 지켜 미안하다는 역자의 답장에, 매뉴얼에 없던 애드립(?)으로 '슈퍼우먼이시네요.'라는 회신을 했다가 편집장에게 불려갔다. 알고 보니 역자가 남자였던 거다... 수명이 3년쯤 줄어드는 경험이었다.


한 번은 외근을 나간 편집장에게 전화가 왔다.

"00씨가 두 시간 전에 메일 보냈는데 왜 아직도 답장을 안 한 거야? 너네 사무실 가서 두고 보자."

나와 B는 검사에게 사형을 구형 받고 판사의 최종 선고를 기다리는 미결수처럼 바들바들 떨며 편집장을 기다렸다. 사무실에 복귀해서는 생각보다 덜 혼났지만 그때의 공포심은 아직도 생생하다.


또 한 번은 독자가 회사 홈페이지에 문의 글을 남겼는데, 나와 B가 동시에 독자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니까 똑같은 답장이 독자에게 두 번 간 거다. 이 사실을 안 편집장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 보며 말했다.

"어쩜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하게 일들을 하냐?"


 편집자 B가 역자에게 회신을 보내면서 '그 책은 저희 사무실에 있습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책은 XX 출판사(우리 출판사)에 있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고, 둘 다 부장에게 불려가 일장 연설을 들은 적도 있다. 사장님이 특히 싫어하는 실수라고 했다.


 우리는 외주 작업자와 번역가의 수발을 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도구가 눈 앞에서 사라지면 언제든지 또 사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편집자들이 6개월이 멀다하고 계속 그만둬도 개의치 않고 계속 사람을 새로 뽑았다. 경영진이 그렇게 껌뻑 죽는 역자들에게 처음 전화를 하면 항상 듣는 말이 "편집자님 또 바뀌었어요?" 였다. 


출판사와10년 가까이 거래해온 외주 편집자나  화려한 스펙의 역자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니깟 것들'이라며 무시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출판사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내가 드디어 해냈어!!!!!


세상에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나중에 성공해서 출간하게 될 자서전에 실을 내용까지 미리 써놓았다. (이게 아직도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되어 있었다. 지금 보면 너무 오글오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생각하지 말고, 그 일을 통해서 나중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를 생각하라.

나는 IT 분야로 갔기 때문에 개발자처럼 생각하고 기계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개발자와 커뮤니케이션하고 시스템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 업무였으므로.

내가 출판사 편집자가 되었다면, 사회와 문화의 흐름과 트렌드를 생각하고 좋은 텍스트와 콘텐츠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4개월 만에 출판사를 그만뒀다. 원고를 교정할 때,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별 것 아닌 일에 인신공격성 폭언을 매일같이 퍼붓고, 월급을 준다는 이유로 직원을 인격체가 아닌 도구로 대하는 곳에서는, 결코 내가 얻어갈 것이 없음이 분명했다. 내가 아무리 경력이 쌓인다 해도 책임 편집은 계속해서 외주 편집자가 할 것이고, 역자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 신세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4개월의 도전을 끝내고 다시 이커머스로 돌아왔다. 

운 좋게도 이직한 회사는 일정 압박도, 야근도 없었다.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는 상사도 없다. 연봉은 당연히 훨씬 높아졌다. 연차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다양한 복지 제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도구가 아니라 인간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던, 글 만지는 일을 하고자 하는 나의 도전은 물론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형태나 방법이 다를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 방향으로 전진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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