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메모를 꺼내보는 일이란
뭐라도 꾸준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사방 모든 것이 글감이 되어 간다. 그것들을 잡아둘 수첩을 찾다가 책장에서 오래된 수첩을 꺼내 잡았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의 일기장이다.
사실 일기장이라 부르기엔 거기에 일기는 몇 개 없다. 차라리 런던에서 기차값 얼마, 파리 숙소 얼마 따위의 가계부, 그 옆에 휘갈기듯 날려 적은 ‘유람선 탄날’, ‘100달러 분실’따위의 메모로 완성된 “여행일지”라 부르는 편이 알맞다.
여행을 떠날 때엔 꼭 작은 수첩을 가방 맨 앞에 넣는다. 이젠 더 쉽게 기록할 수 있는 핸드폰과 카메라가 있지만 수첩을 뺀 적은 없다. 왠지 같은 일이라도 내 글로 바꿔 메모하고 싶고 그렇게 메모하면 생각이 쉽게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무슨 대단한 게 생각난 듯 가방을 뒤져 수첩을 꺼내는 행위가 멋있기도 했고.
다른 일은 기억 못 해 곤란해지기 일쑤면서, 유독 여행의 기억은 아주 사소한 것도 잊지 않는 바람에 동행이었던 이들을 소름 끼치게 하곤 한다.
1)
그날 우리 먹은 게 3년 산이었나?
7년 산. 너가 집에 가져갈 거라고 절대 안 된다고 우겼는데, C가 다음날 사주겠다고 그냥 땄다가 너 침대에 다 흘려서 그날 너 울었어.
2)
그때 밤 열 시 기차였는데 우리가 55분에 도착했다고 우리 안 들여보내 줬잖아
아홉 시 아니고 열 시 맞아?
우리 시장에서 아홉 시 사십 분에 나왔어.
-!
졸려 곯아떨어지기 전에 단 한글자라도 써넣은 메모, 그 덕분인 게 확실하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명석한 두뇌 덕분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어릴 때 읽은 메모 벽이라는 수필을 생각했다. 무형식의 형식을 처음 배운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다. 온갖 것을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바람에 자기의 습관을 ‘메모 벽’이라 칭하던 작가의 수필.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얼마나 성실한 글쟁이인 것인가, 존경을 표하게 된다.
쓰는 것에 게을러 메모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일지를 하나씩 들춰보니 그림 그리듯 그날들이 떠오른다. 내가 나를 잘 모르고 과소평가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여행의 광경에 흠뻑 취해 메모고 뭐고 꺼내 적지 않은 날도 있었다. 물론 밤늦게 나가게 되어 짐을 털릴까 봐, 10달러 정도만 속옷 안에 구겨 넣은 채 짐 없이 나간 날도 있었고.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숙소겠지) 반드시 정리를 끝냈다. 가계부는 그 날의 일기가 되어 내 행적을 그려주곤 했다. 거기에 덧붙이는 짧은 단어는 내 감정과 생각을 압축할 대로 압축해 달아 뒀다.
짧은 메모들을 하나씩 넘겨보니, 어린 나는 용감했고 훗날 어른이 될 줄 알 만큼 똑똑했으며 꿈꾸는 일이 굉장히 많고 이뤄갈 준비 역시 충분해 보인다. 이런 어린 날을 살았다면 지금 여러모로 좀 쭈굴한 나도 괜찮은 사람이겠다는 확.신.을 하기로 했다.
스물 둘 배낭 대신 만 오천 원짜리 캐리어를 들고 프랑스로 떠나던 나는 서른 넷의 나에게 다시 이렇게 응원을 보낸다. 활자로 적어둔 생각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게 분명해 마음 위로 글자가 울렁울렁인다.
그렇다면 서른 일곱, 마흔 여덟의 내가 기운을 낼 수 있도록 메모를 계속해야겠다. 여행이 멈춘 지금, 내 일상의 순간이 흩뿌려지지 않게 짧은 단어 일지라도 모아 담아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