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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 Aug 23. 2020

인생영화는 이렇게

겁먹지 않는 황금비율 철학

     아무 목적지 없이 종종 걸어다니곤 한다.

퀴퀴한 매연이 가득한 도시를 좋다고 걸어 다닌다. 집에서 대학로까지, 도봉에서 고대까지, 종로에서 신촌까지, 종로에서 수유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정상적으로 보일만한 거리를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모르겠다. 활동반경이 (집, 학교, 명동, 대학로, 신촌, 종로 정도로) 일정하다 보면 같은 길을 걷기도 하고, 다른 길을 걷기도 하는데 나는 매번 가는 길로 가되 아주 조금씩 새로운 길을 시도해보는 편이다. 7대 3의 비율 정도? 그렇게 조금씩 새로운 길을 찾아가다 보면 반가운 정도의 익숙함과 두렵지 않은 정도의 새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나만의 길이 탄생하게 된다. 거리의 풍경들이, 사람들이, 그들의 삶들이 걷는 순간 내내 오감으로 들어온다. 너무 빠르지 않게 걸어갈 때만 온전하게 접할 수 있다.


     한 번 내 길이 정해지게 되면 주야장천 그 길로만 다니게 된다. 같은 길이지만, 매일 다르다. 같은 장면이지만 내 오감이 받아들이는 것은 매일 다르다. 좋아하는 장면이 많은 길을 또 가보고 싶으면서도 이번엔 어떤 새로움이 나를 반길지 두근두근 해 진다. 계절이 바뀌면 길가 나뭇잎 색이 변하는 걸 가장 쉽게 찾을 수 있고, 매일 사람들의 옷이 바뀌고, 매 시간 그들의 행동들, 그들과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 이야기의 분위기까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다. (때때로 나와 그 사람들의 관계가 무無에서 유有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지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내가 새로운 것을 도전할 때의 비율처럼 7대 3 정도인 것 같다. 매 장면의 70%는 나에게 아주 익숙한 장면이지만 30%는 지난번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7대 3의 비율이 내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마법의 황금비율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너무 욕심을 내면 나도 모르게 길을 잃을 것만 같으니 30% 정도 이미 내가 익숙해진 것에 새로운 것을 더 한다랄까 - 길 위의 무언가가 7할의 익숙함이 되기까지 같은 길을 걷다 보면 그 길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순간의 내 생각들도 같이 쌓이게 된다. '여기에선 S랑 떡볶이를 먹으며 이런 얘기를 했었지', '지난번에 여기에서 B와 U가 다퉜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길이 항상 좋은 것만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치부를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나의 길에서 멀어져 다른 길로 다니고 싶지는 않다. 나의 길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그 익숙함, 추억, 반성 속에서 나는 피식 웃기도 하고 나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 돌아보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나만의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그런 기억들이 인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화의 장면으로 모이는 것 같다.


     같은 길을 걸으며 전에 하다 말았던 생각을 이어하게 되면 내가 그 순간 내릴 수 없었던 결정을 하거나 생각나지 않았던 답을 찾게 될 때 그때가 바로 3할의 새로움이 7할의 익숙함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갈만한 추억의 장면이 된다. 그리고 다음번 그 길을 걸을 땐, '여기서 내가 그런 결정을 내렸지!'라는 생각이 7할의 익숙함이 되어 떠오른다. 그냥 좋아하던 장면을 더 좋아하게 되는 순간이다. 동시에 그 결정을 내렸을 때 옆 과일가게 아주머니께서 하신 말씀, 구둣방 할아버지께서 닦고 계셨던 구두까지도 함께 내게로 다가온다. 사소하고 나와는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오감은 이마저도 3할의 새로운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도전을 할때에도 같은 7대 3의 비율이 좋다. 어느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면 조금 덜 두렵고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진 몰라도 예기치못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자신감에서 오는 안도감. 덕분에 나는 여태껏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아올 수 있었고 여전히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름 안전하게 움직이는데 무모함이라 여긴 친구도 있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커져 제자리 걸음에도 만족하는건 아닐까.


그곳에서 나는 처음 세상을 경험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말뚝박기를 하며 놀았고,

그곳에서 우리는 정말 달에 토끼가 사는지에 대한 토론을 했고,

그곳에서 나는 너의 결정을 묵묵히 지지하기로 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 무너지듯 울기도 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성장했다.


     내 장면들의 '그곳'은 비슷한 듯 전부 다르다. 새로운 장면들을 보고 듣고 머릿속으로 맛보고 감상하면서 나는 새로운 결정을 내리고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오!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좋아 자꾸만 걸으려고 하는가 보다. 그 순간 내게 들어온 장면들은 나의 경험의 일부가 되고 추억을 곱씹어 보게도 하고 훗날 결정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단지 내가 성장했다 느끼는 순간에 함께 해줬기 때문에 우선은 기억으로 기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들이 한데 모여 '나'라는 인격체의 성장기를 그린 인생영화로 완성된다. 인생영화의 끝은 없다. 상영시간이 정해진 보통의 영화들과는 달리 '나'의 성장에 따라 계속해서 장면이 더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7:3의 비율을 유지한다면 꾸준히 장면을 더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인생영화가 아주 긴 영화가 되면 좋겠다.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자극받고 감탄하고 오감으로 받아들이고 싶으니까-



몇 가지 길 사진


-> 마음에 들었던 폰트의 최 소아과의원


-> 마음이 답답했던 날인데 육교 위에서 바라본 이 길이 너무 시원했다. 저 멀리 남산타워도 보인다.


-> 한옥에 살고 싶단 생각을 많이 한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던 길이라고 해야 할까? 내부는 현대식이어도 상관없다. 한옥의 우직하고 둥근 곡선이 나를 단단하면서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한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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