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옥
18. 옥
아랑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직도 귀 안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지금은 여자의 잦아든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개루의 손에는 아마도 사람의 살점이 붙어있을 부젓가락이 들려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지 아느냐.”
개루의 목소리는, 아랑의맨 어깨를 쓰다듬으며 꽃을 물어볼 때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그러나 아랑은 대꾸할 수 없었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걸루에게······.”
개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들린 부젓가락을 바라보았다.
“네 정인에게 보낸 여자다.”
아랑이 그 말을 듣는지, 듣지 못하는지 개루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저 여자는 도미가 내게 보낸 여자이고.”
도중 말을 멈춘 개루는 부젓가락을 놓았다. 짚풀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개루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아랑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고구려로 달아나다가 국경에서 붙잡혔다. 그리고 끌려왔지.”
아랑은 부들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두 팔로 두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아랑아······.”
아랑의 어깨로 향하던 개루의 손이 문득 멎었다.
“아랑아, 너는 왜 내 것이 아니냐.”
개루의 목소리는 뜬금없게도, 한없이 슬픈 것이었다. 아랑은 물론이거니와 개루조차도 처음 듣는 제 목소리였다. 한 번 숨을 참아보던 개루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너를 품고, 품고, 품어도 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네게 물을 수는 없었다. 네 안에 있는 정인을 눈치 챌 때마다. 네가 내 것이 아님을 눈치 챌 때마다. 그걸 말하는 순간, 그걸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기에.”
옆방의 흐느낌소리가 잦아들었다. 개루는 아마 여자가 혼절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옥지기를 부르려던 개루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아랑을 바라보았다. 아랑의 모습에 재증걸루의 모습이 놓였다. 개루는 고개를 저었다.
‘걸루는 내일이면 죽은 목숨이다. 이제 걸루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저 가엾은 아랑뿐인즉······.’
그것이 사실이건만. 개루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랑아. 나는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너를 놓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랑은 여전히 개루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개루는 못내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떼어 놓아야하는 마음이라면. 개루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개의치 않다······.
“나는 너를 보내주지 않겠다. 네가 아프다면 의원을 보내주마. 가장 좋은 약을 보내주마. 너는 내 궁 안에서는 어디든지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내 곁에서 너는 평생을 살 것이다. 그것이, 그것이 너를 갖지 못하는 이 치졸한······. 이 보잘것없는 개루라는 사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복수다. 왕으로써가 아닌, 사내로서.”
개루의 눈가에 무언가 미지근한 것이 괴었다. 눈에 고이는 그 이질감에 개루는 눈을 감았다. 아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개루에게는 다행히도 왕의 눈물을 본 사람은 없었다.
“네가 죽어 궁 안의 흙이 되는 순간까지, 너는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내 주위에서······. 너는 내가 가진 모든 것들 사이에서 섬이 되어라. 너는 결코 내 것이 아닐 터이지만······. 그렇게 너는 내 궁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값진 보석이 되어라. 녹음에 핀 한 떨기 꽃처럼 그냥 살아라. 섬처럼. 바위처럼. 살아라······. 언젠가 내 곁을 벗어나는 그날까지.”
개루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날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개루는 말을 멈췄다.
“그래도 살아라. 비록 너를 갖지는 못했다만······. 너를 품은 사내로서. 바라는 바다.”
힘겹게, 힘겹게 개루는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언제든 오거라. 네가 원한다면······.”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던 개루는 그저 몸을 일으켰다. 개루가 손짓하자 옥지기가 얼른 옥 옆으로 다가왔다.
“고구려의 첩자인 저 계집은 날이 새기 전에 목을 벨 것이며, 이 아이는 묶어 놓거라.”
개루가 뒤돌아섰다.
“나는 걸루에게 가겠노라.”
어두운 옥사를 걸으며 개루는 생각했다.
잊거라······. 잊거라······. 언젠가, 언젠가 다른 날이 올 때까지.
그 다른 날이 오면 다시 살거라. 아랑아.
네 님과 노래를 부르고,
나물을 뜯고, 샘물을 마시고.
누구의 것도 아닌 땅에서.
네 님과 둘이. 산새처럼, 다람쥐처럼.
그렇게 살거라.
부디 다른 날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