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ug 23. 2020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영화 '테넷'(2020)에 관하여

(리뷰라기보다는 생각나는 대로의 끼적임)


결국 한없이 높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시네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속절없이 앉아 1초에 24 프레임의 죽음을 바라보는 일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보면서 캐릭터 자체보다는 그들이 속해 있는 서사와 그것이 만들어지는 구조 자체가 더 인상적이라고 생각한 경우가 많았다. 언제나 비선형적 서사가 추구해볼 수 있는 극한의 구조적 복잡성이나 서술 트릭을 통해 어떤 효과를 만들어냈는데, <테넷>(2020)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인류의 생존이 시간과 공간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 달려 있는 세상에서, 일어날 일이 예정대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인물들은 그것에 대해 한 번 더 물어보고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다.


영화 '테넷' 스틸컷


150분의 상영시간 안에 잦은 컷 편집과, 발화와 보여주기를 통한 중요 개념 설명이 담겨 있다. 선형적 시간관으로 말하자면 어느 것이 정방향이고 어느 것이 역방향인지를 생각하는 데에 일부나마 관람의 에너지를 써야 하기도 했지만,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념 하나하나를 낱낱이, 그리고 샅샅이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Don't try to understand it, feel it."이라고 과학자가 주인공에게 말하는 대목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결국 일어나는 일의 순서대로 촬영되지 않은 이야기를 관객이 그렇게 느끼도록 여러 영화 언어와 기법을 통해 가공하는 것인 것처럼, 이 이야기도 실제 물리학적 법칙들을 엄정하게 대입해야만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이동 등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가 그 설정 자체만으로 여러 패러독스를 생각하게 하듯)


내게는 <테넷>을 보면서 가장 많이 겹쳐 생각한 것이 <컨택트>(2016), 더 정확히는 그 원작인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1998)였다. 나는, 우리는, 결국 시간에 매여 살고 인간의 이해 범주에 속해 있는 시간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목적론적 세계관과 비선형적 시간 인식을 언어학자와 물리학자의 시선에서 전면적으로 다룬 테드 창도 소설 밖에서는 결국 인과와 선형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인간이듯이, 크리스토퍼 놀란도 영화 밖에서는 마찬가지로, 단지 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세상을 만난다.


영화 '테넷' 스틸컷


남는 질문은 다시, '시네마'다. <Variety>의 칼럼니스트 Guy Lodge는 이 영화에 대해 "It’s more convoluted than it is complex, wider than it is deep."이라고 표현했다. 깊기보다는 넓고, 그 자체로 복잡하다기보다 단지 거기 이르는 과정이 길다는 말이다. 놀란 영화에 처음 합류한 제니퍼 레임(편집)과 루드윅 고란손(음악)의 존재도 확실히 다가왔는데, 그 말은 영화가 한 사람의 뜻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불확실성을 뛰어넘어 서로가 가진 에너지를 집약해낸 산물이라는 것을 <테넷>을 보며 생각했다는 뜻이다.


<테넷>의 북미 최종 예고편 말미에 적힌 'Thursday, Septepber 3, Where Theaters are Open'이라는 개봉 고지 문구가 새삼 눈에 띈다. 극장이 열려 있는 곳에서. 전 세계 동시 개봉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가 국가와 지역에 따라 선별적으로 상영하고 와이드 릴리즈도 아닌 채로 관객을 만나는 일이 앞으로도 또 일어날까. 한 편의 영화가 주는 시청각적 체험이, 영화 바깥에서도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천천히 나섰다. 이 집념과 이 뚝심을, 오래 만나고 싶다.


영화 '테넷' 국내 메인 포스터

<테넷>(Tenet, 2020),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20년 8월 26일 (국내) 개봉, 150분, 12세 관람가.


출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케네스 브래너, 마이클 케인, 클레멘스 포시, 히메쉬 파텔, 마틴 도노반, 애런 테일러-존슨 등.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영화 '테넷' 스틸컷



그러니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말이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믿음일 수 있다고 <테넷>(2020)은 내내 말한다. 세상이라는 건 혼자 힘만으로는 안 되고 누군가와 누군가의 뜻이 모여야만 하고, 이 말은 <인터스텔라>(2014)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거대한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일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온 위험을 무릅쓴 채 거기 뛰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여러 번 본 적 있다.


"아직 반쯤 남았어, 처음에서 만나자고."라는 말도 어디선가 누군가 했을 말이다. 모든 여정을 지나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하는 말, 이게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며 이야기의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하는 말. 한 단어를 떠올리며 여러 영화, 드라마, 게임 속 얼굴들을 겹쳐 생각했다. 어떤 것을 맞이하든 그것의 주인공(Protagonist)이 되기로 한 결연한 모습들을.



*이메일 영화리뷰&에세이 연재 [1인분 영화] 9월호 구독자 모집(~8/31): (링크)

인스타그램: @cosmos__j

그 외 모임/클래스 공지: lnk.bio/cosmos__j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