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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21. 2024

힘없는 카메라를 그럼에도 놓지 않고 붙드는 일

영화 '노 베어스'(2022) 리뷰

"영화는 아주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관객들에게 풍부한 감정을 심어줄 수도 있고 그들이 조금 덜 외롭다고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힘은 또한 파괴적인 방식으로 쓰일 수도 있고, 현상 유지(status quo)에 대한 도전의 방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진실을 자파르 파나히만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Lisa Laman, Collider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이란의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는 2010년 자국의 사회문제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가 정부에 대한 비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20년 동안 영화 제작을 금지하는 조치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해외 출국도 자신의 영화에 대한 인터뷰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No Bears + Jafar Fanahi + interview'라고 무심코 구글 검색창에 입력해 외신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는 그러한 상황마저도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로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법 당국으로부터 상술한 바와 같은 처분을 당하고 아직 2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제79회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노 베어스>(2022) 또한 환경의 제약 속에서 오히려 그 환경을 이야기에 적극 투영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자파르 파나히의 신작이다.


시내의 한 카페에서 주문을 받던 자라는 걸어오는 박티아르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간다. 두 사람은 지금 이웃나라로 도피할 궁리 중인 연인이다. 프랑스 여성의 신원을 한 여권.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여권은 아직 구하지 못했다며 상대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고, 여성은 함께가 아니라면 가지 않겠다고 돌아선다. 이것은 영화다. 잠시 뒤 점차 멀어지는 프레임은 관객이 조금 전까지 본 장면이 '촬영 중인 영화'의 한 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자파르 파나히는 컴퓨터로 현장을 모니터링하며 비대면으로 디렉팅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인터넷 연결이 끊기고, '영화'로부터의 몰입을 깨고 냉혹한 삶의 현장으로 이끌듯 감독의 카메라가 담는 건 전화기를 들고 하늘을 향해 이리저리 손을 뻗어 네트워크 신호를 찾는 스스로의 궁색한 모습이다.


영화 '노 베어스' 국내 포스터

자파르 파나히가 있는 곳은 튀르키예와 마주한 이란 국경지대의 한 마을이다. (영화 밖 스스로의 처지와 같이) 출국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최대한 촬영 현장과 가까이 있기 위해 테헤란을 벗어나 국경지대로 왔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비대면 방식으로 촬영 현장에서의 디렉팅을 수행하고, 촬영본이 담긴 하드디스크 등을 이따금 받아서 보는 일이다. 스태프의 제안에 밀수꾼들이 오가는 비포장도로를 통해 국경선을 밟았다가도, 자신이 밟고 선 흙이 '이란과 튀르키예 사이'임을 깨달은 순간 소스라치듯 돌아선다. 대신 그는 카메라로 마을 곳곳의 풍경과 사람들도 담기 시작한다.


영화가 만들어줄 수 없는 해피엔딩


초반부까지의 <노 베어스>는 마치 이란을 벗어날 수 없는 감독이 이란 국경지대에서 튀르키예의 촬영 현장을 모니터링하며 원격으로 영화를 완성하는 이야기일 것처럼 얼핏 보인다. 그러나 섣부른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자파르 파나히가 머무르는 마을에서 펼쳐지는 여러 일들이 개입한다. 파나히가 머무는 집을 관리하는 간바르에게 빌려준 카메라에는 '녹화' 버튼과 '정지' 버튼을 혼동하여 잘못 누른 탓에 담긴, 마을 사람들의 (테헤란에서 온) 파나히에 대한 경계 내지는 험담의 순간들이 있다. 게다가 파나히가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마을에 알려진 뒤, 마을의 남녀 솔두즈와 고잘은 마을 풍습에 위반하여 교제를 하고 있음이 발각되고 파나히가 찍은 사진들 중 두 사람을 담은 사진의 존재 유무가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곰이 있다면서요?"
"우리를 겁 주려고 꾸며낸 얘기죠."


그러니까 <노 베어스>에서 '영화'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감정이나 희망찬 무언가를 심어주고 동기부여를 해주는 무엇이 아니라, 현실에 불청객으로 틈입하여 거의 훼방을 놓는 것처럼 비치는 무엇이다. 파나히가 제작 중인 영화 혹은 그 주변의 요소들(카메라에 담기는 사진을 포함)은, 영화 안의 박티아르와 자라에게도, 영화 밖의 솔두즈와 고잘에게도 영향을 준다. 억압적인 환경을 벗어나 제3국으로 도피하고자 했던 그들의 바람은 마을에 머무는 파나히의 의도와 관계없이 마을의 오랜 전통이자 미신인 것들, 그리고 국가 권력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좌절되거나 방해받는다. 마치 "거기 곰이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거기 실제로는 곰이 없다고 해도 어느 순간 곰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출입을 꺼리게 되는 것처럼. 영화감독 본인이 영화 안에서 찍는 또 다른 영화가 영화 안팎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동안 보이지 않았을지 모를 것들을 상기시키고 영화의 의도와는 다르게 불편한 일들을 낳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긴장을 넘어 거의 무기력을 낳는다. 파나히는 끊임없이 해당 사진의 존재에 대해 추궁받고, 파나히가 찍는 영화 속 주인공을 연기하는(그리고 실제로 밀입국을 꿈꾸는) 남녀는 영화가 꿈꾸는 해피엔딩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반문한다.



곰이 없는 시대에도, 어디에나 곰이 있는 것처럼


여러 차례 마을 원로들에게 특정한 사진의 존재에 대해 질문받던 파나히는, 마을 촌장과 사람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또다시 사진에 대해 진술할 것을 주문받고, 그것이 "진실"한 것임을 확인시키고자 카메라에 스스로의 증언을 담을 것을 제안한다. 그러자 야곱(마을의 전통에 의해 원래 고잘과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남자)은 카메라를 믿을 수 없다며 코란 앞에 '선서'할 것을 요구한다.


수십, 수백 년을 강하게 뿌리내린 전통(종교, 미신 등을 포함) 앞에서 역사가 짧은 기술과 그와 비슷하게 역사가 짧은 문화예술은 어쩌면 별다른 힘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실제로는 곰이 없는 데도 특정 장소에 곰이 출몰한다며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는 <노 베어스> 속 한 에피소드와 닮았다. '없지만 있는' 것은 국경도 마찬가지다. 앞선 장면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이미 국경을 밟았는데도 그곳이 경계임을 상기한 순간 어떤 힘에 눌린 것처럼 뒷걸음질 친다.


<노 베어스>에서 자파르 파나히 본인이 처해 있는 환경, 그가 찍고 있는 영화, 그가 머무르는 마을의 사건은 상호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촘촘하게 어떤 방향으로 향한다. 곰이 없는 시대에도 어디에나 곰이 있는 것처럼, 아니 사라진 적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될 수 있다는 것. <노 베어스>를 통해 오늘날 관객이 생각하게 되는 건 한편으로 문화예술이 별로 힘이 없고 오히려 어떤 현실 상황을 나쁜 쪽으로 이끌게 될지도 모른다는 냉혹한 자각이다. 또 다른 쪽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그럼에도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인지한 채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실제로 파나히가 솔두즈와 고잘의 사진을 찍었는지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건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기록하고 그와 상응하는 만큼의 지속성을 갖고 끊임없이 반추하고 인식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이다. 영화가 해피엔딩을 부여해 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힐 때 그것을 마치 보이는 것처럼 실재하도록 만들어주는 일이, 영화가 세상에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진실이 아닌가 질문하듯이 말이다. 영화가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분투하는 그 과정 자체는 결코 쓸모없지 않다고.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두 눈으로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는 어떤 진실을, 희미해지기 전에 유형의 것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노 베어스>를 통해 자파르 파나히는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말해주고 있었다.


영화 '노 베어스'를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관람했다. (2024.01.21.)

"꽉 막힌 세계 속에서 오갈 데 없이 헤매는 기행의 비판 받는 자아들처럼. 그렇게 서서, 혹은 버드나무 몇 그루 아래를 걸어갔다가 되돌아오며 기행은 누군가의 명백한 악의마저도 자기 운명의 일부로 여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137쪽)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190쪽)

"병도는 굳은 표정으로 "내가 붓을 가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는 그 붓으로 세상의 권력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고, 그때는 기행도 그 말에 동의했다. 자신들이 언어를 쓴다고만 생각했지, 자신들 역시 언어에 의해 쓰이는 운명이라는 것을 모를 때의 일이었다. 편지는 '그렇기에 함흥에 갔을 때 자네가 밤에 상허를 찾아간 일이며 벨라의 편지를 통해 자네가 몰래 소련으로 시를 써서 보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모른 척했으며, 자네가 벨라에게 준 노트도 모스크바의 대사관에서 회수해 내가 없애버린 것이고...'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쯤에서 기행은 더이상 병도의 편지를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대신, 그 밤 상허에게 들은 말들과 항공우편 봉투 속에 넣어 벨라에게 보내던 시들을 생각했다. 결국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한, 그 연약하고 순수한 말들을." (235쪽)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문학동네, 2020


(2024년 1월 10일 국내 개봉, 107분,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 '노 베어스' 국내 포스터

IMDB에 등록된 <노 베어스>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이 간결하고 담담한 서술이, 106분에 걸쳐 담긴 영화의 모든 것을 내보인다.


"Two parallel love stories in which the partners are thwarted by hidden, inevitable obstacles, the force of superstition, and the mechanics of power."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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