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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13. 2024

SF 세계관에 디스토피아가 많은 이유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 리뷰

"난 유인원이 인간보다 낫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깨달았지. 유인원이 얼마나 인간들과 똑같은지."
-시저


영화 ‘혹성탈출’(1968) 스틸컷


유인원, 해변, 자유의 여신상. 1968년에 만들어진 영화 <혹성탈출>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몇 개의 키워드, 그리고 그것들이 담긴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SF 영화, 아니 모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거론할 때 몇 손가락 안에 빠지지 않고 언급될 법한 명장면으로 생각될 만한 대목이다. <혹성탈출>을 시작으로 이 시리즈는 5부작으로 만들어졌는데, 센세이션이라 할 수 있었을 만큼 좋은 평가와 반응을 얻었던 1편에 비해 속편들은 그만큼의 명성을 잇지는 못했지만 영화 역사에서 SF 시리즈를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는 연작 중 하나다.


2010년대 들어서 이 시리즈는 현대적 각색으로 리부트 되었다. 2011년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시작으로, 2017년 맷 리브스 감독의 <혹성탈출: 종의 전쟁>까지 새로운 삼부작이었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은 삼부작 중 바로 두 번째 작품. 간단하게는 ‘진화한 유인원이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해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이 시리즈에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영화가 대체로 그렇듯 인간사의 어떤 면을 반영하는 화두가 담긴다.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스틸컷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에서 제임스 프랑코가 연기한 과학자 ‘윌’은 아버지의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해 뇌 손상을 회복해주는 치료제를 개발한다.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유인원들이 임상시험의 대상이 되고, 피시험 중인 유인원들 중 하나로부터 새끼가 태어난다. ‘윌’은 그의 이름을 ‘시저’라고 짓고 집에 데려와서 키우는데, ‘시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높은 지능을 나타내고 이는 ‘윌’의 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임상 효과에 의한 것임이 밝혀진다.


실험실에 갇힌 유인원들은 높은 수준의 지능으로 인해 점차 각성하게 되고, 실험실을 벗어나 독자적인 무리를 이루어 삶의 터전을 세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세상에는 ‘시미안 플루’라는 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거의 멸종이나 다름없는 재앙이 도래하게 되고, 유인원들은 그로부터 면역력을 갖고 있어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시간적 배경은 ‘진화의 시작’으로부터 10년 후다. 어렸던 ‘시저’는 특히 다른 유인원들보다 더 지능이 뛰어났는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어느덧 유인원 무리의 리더로 성장해 있다. 전작에서 인류를 휩쓸었던 재앙은 어느덧 과거의 일이 되어 있고, 작중 유인원은 원시 인류를 연상케 하는 부락을 이룬 모습이다.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스틸컷


작품의 발단은 그들의 부락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염병으로부터 살아남은 인류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부터다. 각자의 환경에서 살고 있기만 하면 괜찮았을 텐데, 인류는 수자원을 찾아 거주 지역 인근의 숲지대를 탐색하게 되고 그러다 유인원 무리와 조우한다. 말을 타고 있고 무기를 소지한 유인원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두려움에 휩싸이는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리더 ‘시저’는 사람의 말을 느리지만 분명하게 구사하며 인류에게 선을 긋는다.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을.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전 세계 7억 1천만 달러의 극장 수익을 기록해 리부트 삼부작 중 가장 성공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앞서 소개한 해변과 자유의 여신상 이야기를 다시 꺼내오자면, <혹성탈출> 시리즈는 이미 인류의 종말 이후 유인원들의 진화와 세계 구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인류에게는 디스토피아를 예고한다. 사이언스 픽션 세계관에서의 인류는 왜 대부분 불행한 미래를 맞이하는 것일까.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스틸컷


본래 이 영화 속 유인원들은 자연에서 살았던 게 아니라 전작의 주인공 ‘윌’이 근무한 제약 회사의 실험실에 갇혀 있었다.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을 위해 인간과 뇌 구조 등이 비슷한 유인원이 임상 실험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점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물론 문제는 이들이 생명체로서의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하고 적당히 이용되다 버려지는 도구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속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 무리에는 실험실에서 지난날 겪었던 상처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들이 있다. ‘코바’와 같은 이들이 바로 그렇다. 작중 시점에서는 일종의 ‘시저’ 오른팔처럼 측근으로 활약하고 있지만 그의 몸에는 고문에 가까웠던 실험들로 인해 생긴 흉터가 가득하다. ‘코바’는 그래서 인간을 적대한다. 버려져 있던 댐을 재가동하기 위해 인간 생존자 무리들이 영역을 침범해왔을 때 ‘시저’는 그들을 경계하면서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들의 댐 출입을 조건부 허용하지만 ‘코바’는 ‘시저’의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속 갈등은 인간 대 유인원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유인원 무리 내에서의 갈등을 동반한다. 인간들이 총과 같은 무기를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세력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들에게 섣불리 전력원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불가피한 무력 충돌을 먼저 유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대립한다. ‘코바’는 급기야 “‘시저’는 유인원보다 인간을 더 좋아한다”라며 ‘시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긴장 상황이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불안감을 가중시키듯 영화 초반부에는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글로 새겨져 있거나 작중 캐릭터에 의해 발화됩니다. 시미안 플루의 창궐로 인해 인류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시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몸소 지켜봤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아마도 멸종했을 것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시저’는 유인원 무리를 이끌어 나가면서 그것을 마치 철칙처럼 믿어왔다. 서로 적대하고 반복하다가 자멸한 인류의 모습을 교훈 삼아(<혹성탈출>(1968)에도 핵전쟁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오늘의 유인원은 지난날의 인간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이제 자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인간들의 생존자 집단이 있음이 밝혀진 이상 그 철칙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유인원 무리의 안전을 해치는 유인원이 있다면 유인원 무리의 존속 자체를 위해 그를 해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스틸컷


이 이야기를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흔한 여름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소비하지 않는다. 50년 전에 만들어졌던 시리즈에서 배우들이 탈처럼 의상을 갖춰 입고 유인원을 ‘연기’했다면 이 리부트 시리즈에서는 ‘모션 캡처’라 불리는 정교한 촬영 기술과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어 유인원을 현대적으로 ‘탄생’시킨다. ‘시저’를 연기한 앤디 서키스는 이미 ‘킹콩’이나 ‘골룸’ 등 다른 작품 속 모션 캡처로도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말 ‘시저’ 그 자체가 된다. 단지 겉보기만을 구현한 것이 아니라 얼굴의 미세한 떨림과 신체 움직임 그리고 감정 연기까지도 완벽히 소화해냈다. (앤디 서키스는 모션 캡처 연기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20년 가까이 연극 배우로 활약해왔다.)


결국 관객은 인간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 이 유인원들의 영화를 보면서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지능이 발달한 유인원들의 움직임과 감정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만나게 된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질문,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 및 유인원 집단 내부에서의 갈등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판타지 영화 보듯 관찰하는 게 아니라 세밀하게 만들어진 디스토피아적 SF 세계관의 하나로서 거기 빠져들게 된다.


이 이야기가 입체적이고 풍부한 화두를 던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평면적인 선악의 대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원인과 여러 세부 사건들이 상세하게 다뤄지며 어느 한쪽이 독자적으로 생존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서사도 아니다. 종족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입장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니까. 영화 밖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났고 일어날 수 있기도 해서 유인원과 인간은 닮아 있다.


굳이 나누자면 인간 중에서도 다른 종에 대해 입장이 열려 있고 선한 마음을 가진 인물과 유인원을 단지 동물로만 취급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유인원 중에서도 평화와 번영을 꿈꾸는 인물과 인류를 배척하고 적대하는 인물이 모두 존재한다. 그러므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어떤 캐릭터에 관해서 그의 품격이나 가치관을 말할 때 그가 속해 있는 종족이나 집단 자체가 판단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시리즈 내에서 전작인 ‘진화의 시작’은 상대적으로 인간 세계의 이야기가 더 많이 다뤄지고 다음 작품인 ‘종의 전쟁’은 본격적으로 유인원 세계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반격의 서막’은 앞뒤를 이어주는 연결점의 역할을 많이 담당한다. 삼부작을 말하는 데 있어 두 번째 작품을 중점으로 다루는 것은 이 연결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국내 메인 포스터


사이언스 픽션 장르의 상당수 작품은 사람들을 특정한 국가나 지역, 종교 등으로 구분하거나 범주화하지 않고 주로 ‘인류’나 ‘지구인’으로 다룬다. 다시 말해 사람이라는 ‘종’ 자체가 중요한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에서도 현 인류와 뮤턴트는 작중 인물에 의해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관계처럼 묘사되며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역시 전작에서 등장한 시미안 플루는 단지 유행병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류 전체를 재앙으로 몰아간다. 참상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으나 수십 억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언급만으로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로 상정하는 SF의 이런 구조는 인류의 화합과 번영을 믿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상황 앞에서 영화 속 사람들이 (주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연합해서 외계인에 맞서는 건 그들이 국가와 문화를 초월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있는 더 큰 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연합을 택한 결과다. 그러니까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처럼 인류 전체가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공동의 적 없이도 힘을 합치는 일은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이례적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그래서인지 도래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 그 대부분은 인류 멸망의 상황이다. 자연 재해이든 전염병이든 외계인의 침공이든 간에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발단을 설정하는 경우가 단지 예기치 못한 위협에 국한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나 문명의 이기가 부르는 부정적인 면을 다룬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전염병의 원인이 된 것도 알츠하이머 치료제가 유인원에게 높은 지능을 준 반면 사람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미래를 유토피아로 가정하는 건 다소 재미없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다. SF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순히 따뜻하고 밝고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보다 고난과 시련을 주고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이야기, 아니면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떤 가능성을 남기는 이야기가 더 입체적이고 풍부한 감정적 울림과 메시지를 준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이라 해도 단지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모두 함께 멸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 사이언스 픽션을 관객이나 독자로서 지켜보는 우리는 (그러한 세계가 도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데 그 근본적인 역할이 있겠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무엇보다 주인공 ‘시저’의 위엄과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좋은 리더십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데, 유인원은 인간과 다르다 생각했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유인원과 인간이 다를 바 없다고 아들에게 자조하듯 말하는 ‘시저’의 모습은 잊히기 어려울 만큼 여전히 생생하다.


*이 글은 2020년 10월 16일에 쓰였다.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스틸컷


*<혹성탈출> 시리즈 전작들은 디즈니플러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s://disneyplus.bn5x.net/4P93Y1


https://brunch.co.kr/@cosmos-j/1575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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