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션>(2015), 그리고 오늘
*영화 <마션>(2015)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을 다시 본다. 비현실적이라 여겨질 만큼 매우 낙천적이고 엉뚱한 주인공과, 모래 폭풍 정도를 제외하면 매우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짜여진 이야기의 구조가 만나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은 차분하게 관망하듯이 모험담을 마주할 수 있다. 영화와 소설 모두, 극한의 상황에서도 끝내 꺼뜨리지 않는 생존 의지와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한 끈기, 그리고 큰일이 생겼을 때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사람들의 모습에 일단 뭉클해진다.
그런데 영화를 세 번을 보고 나니 조금 삐딱해질 것도 같다. 아무리 살기 위한 의욕이 충만하다 한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기어이 놓이고야 만다면. 화성에 고립된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지구에서는 이미 날 포기한 상황이라면. (영화에서는 전혀 슬프지 않게 그려지지만 어쨌든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장례식까지 치러지지 않는가.)
이 모든 것들을 하나씩 인과 관계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물론 안다. 사실성이 아무리 높다 해도 한 편의 영화로서 어느 정도는 연출된 상황도 있을 것이고. 마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지구에서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고, 의도와 상관없이 벌어지고 산재해 있는 골칫거리와 난관들이 너무나 많다. 영화가 끝날 무렵 예비 우주비행사들을 가르치는 교관이 된 마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끝나는 구나” 싶은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만 뭔가를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이해관계 혹은 감정에 의해서 무수한 언행들을 이 세상에 ‘생산’해낸다. 그리고 그 순간의 미묘한 공기의 흐름과 알 수 없는 온도 변화, 인간의 뜻과는 무관한 자연의 섭리들, 인간 자신도 모른 채 스스로가 매 순간 이루고 변화시켜가는 그 일련의 흐름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내가 어찌할 도리가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며 착각하거나 자만하곤 한다.
이 세상은 원래 내 뜻과 무관하게 돌아가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흐름에만 맡기자는 것은 아니다. 재난은 어쨌든 내게 일어났고, 여기서 우주 해적 마크 와트니가 될지 그냥 화성에서 굶어 죽는 마크 와트니가 될지는 마음 먹고 두고 봐야 알 일 아닌가. 내 의지와 행동은 어떤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가능하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그 무엇과 가깝도록, ‘영향’을 줄 뿐이다.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지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뿐이다. 이를테면 며칠 전 내가 어느 기업의 채용 면접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내게 또 다른 결정적인 기회를 안겨줄지 누가 알겠는가. 이미 나는 몇 년 전에 떠올리고 상상했을 모습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의 ‘나’로 새로운 오늘을 살고 있다. 매 순간 나도, 다른 사람도, 이 세상도, 조금씩 변화하니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란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그럴 수 있어” 못지않게 내가 좋아하고 종종 쓰는 말이 하나 있다. “그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모른”다. 모든 일에 있어서 의미는 언제나 그것이 지나고 나서야 만들어지거나 부여되지 않던가. 영화 <마션>에서 수백 일 간의 화성일을 지나 마크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날. “Day 1"이라는 자막이 짤막하게 지나간다. 화성에서 처음 감자를 수확할 때 그랬던 것처럼, 척박한 교정 뜰에 돋아난 이름 모를 풀을 향해 인사한 직후다. 그래, 오늘은 어제와 다른 일이 일어나는 첫 번째 날이다. 과연 오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또 내게 무슨 일이 찾아올까?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흘러나오는 노래는 바로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다. 어쨌든 오늘도 잘, 살아보자. 두 발 붙이고 있는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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