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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11. 2015

무심하거나 혹은 열어두거나, 그때든 지금이든.

<나이트 오브 컵스>(2015), 테렌스 맬릭이 '순간'을 해석하는 방식


<나이트 오브 컵스(Knight of Cups, 2015)>, by 테렌스 맬릭

2015년 11월 11일 (국내) 개봉, 118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크리스찬 베일, 나탈리 포트만, 이모겐 푸츠, 웨스 벤틀리, 안토니오 반데라스, 케이트 블란쳇, 테레사 팔머, 이사벨 루카스, 조엘 킨나만, 조 맨가니엘로 등.



영화를 본 직후_


1. 표면적으로는 LA에 사는 작가가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어떤 이상한 일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 실제로는 아마도 타로카드에 담긴 상징들을 영상으로 풀어가려는 이야기. 이것이 <나이트 오브 컵스>를 그래도 짧게 요약하라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2. 무언가가 되는 것도, 무엇을 하는 것도, 무엇의 꿈을 꾸는 것도 결국 모두 이 순간이고 한 순간이었다. 전체의 각본은 있으되 모든 장면이 각본 없이 만들어진, 이 즉흥적인 관념과 상징으로만 채워진 <나이트 오브 컵스>가 남긴 것. 진주를 찾을 수 있는 곳은 기억도 꿈도 아니라 그저 느끼는 지금 뿐이라는 것이었다.


3. 극영화로서의 '이야기'를 (테렌스 맬릭 감독의 전작들이 그렇듯) 기대해서는 안 될 것. 그의 영화를 움직이는 것은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니라 공간이자 이미지이며, 영화 바깥의 철학이다.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영상예술가 정도로 보면 되겠다. 수많은 익숙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은 캐릭터가 아니라 그저 프레임 안에 담긴 사람에 가깝다.





더 생각해보기_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주인공 릭의 이름은 영화가 시작한지 30분이 되어서야 처음 언급되고, 영화에서 이름을 묻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듯 무심히 지나간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나이트 오브 컵스>가 캐릭터의 인물됨이나 특성 혹은 인물 간의 관계 자체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다. 그러니 '줄거리'라는 것이 그다지 의미 있는 정보가 되지는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마도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에 친숙하지 않은) 관객들을 더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건, 내레이션의 화자 역시 일정하지 않다는 것. 마치 여러 장의 타로카드처럼 개별적인 여러 화자가 등장하여 그저 순간의 관념들을 늘어놓는다.



감독의 전작인 <투 더 원더>나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는 그래도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뭔가를, <나이트 오브 컵스>에 비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자연 혹은 생명 자체를 예찬하는 주제 의식은 다소 약화되었고, 그저 어떤 상황에서 인물이 즉흥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그에 따라 주변 사람은 또 어찌 반응하는지, 그런 것들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저 순간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이트 오브 컵스>는 '순간'은 어떻게 이뤄지고 그 순간은 어떻게 다른 순간을 낳는지, 인과 관계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탐구해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이 영화는 큰 틀은 있지만 매 장면의 촬영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크리스찬 베일에 따르면 테렌스 맬릭 감독은 영화가 무엇에 관한 작품인지 배우들에게 상세히 알리지 않았고 촬영에 들어가기까지도 뭘 해야할지 몰랐다고 한다. 촬영에 걸린 기간보다 촬영을 마치고 후시녹음으로 내레이션 작업을 하는 데에 걸린 기간이 더 길었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나이트 오브 컵스>는 오히려 모든 걸 인과 관계나 일련의 흐름에 의해 인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짜맞추려는, 일반적인 감상의 형태를 벗어나보기를 은근히 종용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언제나, 영화에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순서를 의도적으로 비틀어놓으면 그것의 순서를 머릿속에서 재조합하는 일종의 본성 같은 것이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이 순간을 이 순간답게, 온전히 만끽하면서 보낼 수 있다면 삶은 조금 더 풍요로운 쪽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그때도 지금도, 곧 지금이 될 나중도, 언제나 순간이고 찰나다. 여정은 곧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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