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2004), 미셸 공드리
누군가 나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썩 유쾌하지 않지만, 사람이든 사건이든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하나쯤은 있다. 여기서는 주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아예 몰랐더라면 지금 내가 힘들지 않을 텐데' 싶은 것이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이 삶에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 역시 공존한다는 것을 잘 아는데 어쨌든 그 사람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으면 싶은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 클레멘타인은 처음에는 착하고 순수했으나 이제는 답답해진 조엘에 대한 기억을 (아마도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지우러 라쿠나에 다녀오고, 이를 안 조엘 역시 라쿠나를 찾는다. 여기서의 맹점은 기억을 지우려면 그 기억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모아서 잔인하게도 되감기를 거쳐야 한다는 것과, 기억을 지우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에 관해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 할 순간이 반드시 하나쯤 있다는 것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더이상 모르는 것이 없어져 애정과 호기심이 식었다면, 그 사람에 대한 내 기억들을 지우면 다시 처음처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이터널 선샤인>의 출발선에 있는 물음 중 하나는 그것이다. 그런데 인생에서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만 싹둑 잘라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기억 속 세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현란하고 기발한 편집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억을 지우려 하자 조엘에게는 충격과 혼란이 나타나고,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후회하는 가운데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마침내, 기억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멈추기 위해 활로를 찾기 시작한다.
관계가 어딘가 달라졌음을 느낄 때, 실제로 달라진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 방식일 것이다. 사랑은 기억도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곧 나에 대한 기억이고, 어떤 사람과 함께 한 시간들은 쌓이고 쌓여 내 우주를 이루는 수많은 별들 중의 일부가 된다. 익숙하고 편하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래된 연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더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별 필요없어보이는 장면마저 영화 전체의 완결된 이야기를 구성한다. 혹시 모를 일이다, 나도 언젠가 영화 속 라쿠나 같은 데를 다녀온 적이 있고 지금의 나는 그걸 까맣게 잊고 있을지. 그러나 한때의 내가 정말로 상상 속의 그곳엘 다녀온 적이 있다면, 훗날 반드시 그것이 두통처럼 찾아와 나를 흔들어놓을 것이다. 이 세상에 기억을 지워주는 병원 같은 데는 없고, 스스로의 마음 속에 불필요한 병원을 지어 환자가 되길 자청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어딘가 복잡해보이는 <이터널 선샤인>은 실상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하는 영화에 불과하다. 그저 마음에 흐르는 대로,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르고 맡겨보길. 그러면 매 순간이 꼭 남기고 싶은 소중한 순간이 되어가지 않을까 싶다. (★ 9/10점.)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by 미셸 공드리
2005년 11월 10일 (국내) 개봉, 2015년 11월 5일 (국내) 재개봉, 107분, 15세 관람가.
출연: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커스틴 던스트, 톰 윌킨슨, 마크 러팔로, 일라이저 우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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