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리 장편소설 ‘까멜리아 싸롱’(2024)
"호박은 상처로부터 만들어졌거든. 상처 입은 나무의 진액이 흘러 억겁의 시간 동안 굳어서 만들어진 화석이라네. 말하자면 나무의 눈물이 보석이 된 셈이지. 나무와 흙과 생명과 죽음과 시간이 응고된 이 귀한 눈물방울이 나는 못 견디게 아름답다네. 이상하지. 곁에 두고 있자면 강건해지거든."
(...)
"마찬가질세. 나는 그래서 좋은 거야. 상처와 고통과 고뇌와 미련과 회한 같은, 온갖 것이 뒤엉켜 굳어버린 왜곡된 이야기라서. 사람에게서 진정 읽고 싶은 건 그런 인생이거든.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쏟아지는 눈물 같은 마음이랄까.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 때론 사실 아닌 진실이 될 몹시 뜨겁고도 강인한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네. 그런 눈물 같은 이야기들 후련히 쏟아내고 떠난다면, 우리 존재는 끝내 사라져 버린대도 아름답지 않을까. 이 늙은인 여즉 그리도 낭만적인 생각을 한다네."
-고수리, 『까멜리아 싸롱』, 클레이하우스, 2024, 97쪽에서
"천사가 지나갔다.
까멜리아 싸롱에는 자주 침묵이 찾아왔다. 저마다의 침묵을 경청하고 존중하게 된 것도 지난밤의 따스했던 기억 덕분. 어떤 기억은 용기를 내도록 도와준다.
진아가 피아노를 매만졌다. 진아의 목도리처럼 오래되었지만 익숙하고 부드러운 건반의 감촉. 오른팔을 길게 뻗어 피아노 건반을 쓰다듬자 도, 시작하는 피아노 음계 하나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차가운 겨울 하늘에 퍼져나가는 사람의 입김처럼, 멜로디가 시작되었다. 별들이 조그맣게 반짝였다. 고요한 정적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연주. 이윽고 응시하는 깊고 아득한 어둠. 자세히 보려고, 자세히 들으려고 애쓰면서 어둠을 쓰다듬었다. 아주 많은 밤이 겹쳐져서야 만들어진 오늘의 밤. 아주 많은 연이 겹쳐져서야 이루어진 오늘의 만남. 어둠에 묻힌 밤에도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별들은 작게 빛났다. 사람들도 작게 빛났다. 빛나는 것들은 모두 특별한 음을 지녔으므로 저마다의 음계로 노래할 것이다. 기억하진 못해도 익숙한 손길로 건반을 쓰다듬으며 헤아려보는 진아의 마음을 용기 내서 들려주고 싶었다. 오래된 피아노가 노래했다. 까멜리아 싸롱에 별빛이 내렸다."
(112쪽)
고수리 장편소설 '까멜리아 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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