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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30. 2024

지금 이 겨울을 함께할 소설

고수리 장편소설 ‘까멜리아 싸롱’(2024)

"호박은 상처로부터 만들어졌거든. 상처 입은 나무의 진액이 흘러 억겁의 시간 동안 굳어서 만들어진 화석이라네. 말하자면 나무의 눈물이 보석이 된 셈이지. 나무와 흙과 생명과 죽음과 시간이 응고된 이 귀한 눈물방울이 나는 못 견디게 아름답다네. 이상하지. 곁에 두고 있자면 강건해지거든."
(...)
"마찬가질세. 나는 그래서 좋은 거야. 상처와 고통과 고뇌와 미련과 회한 같은, 온갖 것이 뒤엉켜 굳어버린 왜곡된 이야기라서. 사람에게서 진정 읽고 싶은 건 그런 인생이거든.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쏟아지는 눈물 같은 마음이랄까.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 때론 사실 아닌 진실이 될 몹시 뜨겁고도 강인한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네. 그런 눈물 같은 이야기들 후련히 쏟아내고 떠난다면, 우리 존재는 끝내 사라져 버린대도 아름답지 않을까. 이 늙은인 여즉 그리도 낭만적인 생각을 한다네."

-고수리, 『까멜리아 싸롱』, 클레이하우스, 2024, 97쪽에서


11월 30일, '책방연희 광화문'에서 열린 고수리 작가의 북토크(구선아 작가 진행)

오래된 피아노 선율이 가만히 울려 퍼지고 저마다의 삶을 간직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모여 앉아 홍차와 마들렌을 곁들이며 말문을 여는 곳.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작가의 플레이리스트를 순서대로 들으며 인생을 헤아리는 작가의 다정한 소설을 만난다. 『까멜리아 싸롱』의 '까멜리아 싸롱'은 정말 있을 것 같은, 그렇게 읽어지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싸롱의 마담에게도 식구들에게도 그리고 찾아온 사람들 하나하나에게도 골고루 마음을 주며 판타지가 갖는 힘을 생각한다. "통찰력과 연민과 희망을 얻는 데 상상력만큼 적합한 도구는 달리 없기 때문"(어슐러 르 귄)이다.


소설을 빨리 읽는 편이 아닌데, 벌써 하루 만에 절반을 지나고 있다. 개인의 상처도 사회 문제도 마치 실제 이야기처럼 반영된 설진아, 박복희, 구창수, 안지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들의 밤낮을 헤아릴 수 있는 건 이 소설이 세계의 문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열어젖히고는 인물 곁에 가만히 침묵을 지키듯 머무르며 그가 입을 열 수 있도록 '있어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덜 아프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애써 따뜻한 것들을 동원한다. 진실도 작게 말한다."(49쪽) 죽음을 앞둔 이들의 이야기는 자칫 무겁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가장 깊은 밤에 떠났던, 가장 깊은 밤에 반짝였던 우리들의 피크닉"(148쪽) 같기도 하다.


고수리 장편소설 '까멜리아 싸롱'


그저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쓰기 바쁜 나는 고수리 작가의 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기획과 착상, 그리고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에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불어넣는 생생한 단어와 문장에 감탄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와 레이먼드 카버 소설의 면면이 스치는 듯하고 첫눈처럼 홍월처럼 다가와 곁에 머무르는 이 이야기에서 사람을 안아주고 사랑의 선명함을 일깨우는 스토리텔링의 필요를 믿게 된다. 소설의 남은 절반을 읽으며 이 겨울을 능히 보낼 수 있겠다. 그러고는 매 겨울마다 떠올릴 책의 목록에 『까멜리아 싸롱』이 있을 것임을 이미 안다. (2024.11.30.)


고수리 작가님이 직접 만든 '까멜리아 싸롱'의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북토크 현장에서 받은 사인


서점 '책방연희 광화문'에서


"천사가 지나갔다.

까멜리아 싸롱에는 자주 침묵이 찾아왔다. 저마다의 침묵을 경청하고 존중하게 된 것도 지난밤의 따스했던 기억 덕분. 어떤 기억은 용기를 내도록 도와준다.

진아가 피아노를 매만졌다. 진아의 목도리처럼 오래되었지만 익숙하고 부드러운 건반의 감촉. 오른팔을 길게 뻗어 피아노 건반을 쓰다듬자 도, 시작하는 피아노 음계 하나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차가운 겨울 하늘에 퍼져나가는 사람의 입김처럼, 멜로디가 시작되었다. 별들이 조그맣게 반짝였다. 고요한 정적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연주. 이윽고 응시하는 깊고 아득한 어둠. 자세히 보려고, 자세히 들으려고 애쓰면서 어둠을 쓰다듬었다. 아주 많은 밤이 겹쳐져서야 만들어진 오늘의 밤. 아주 많은 연이 겹쳐져서야 이루어진 오늘의 만남. 어둠에 묻힌 밤에도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별들은 작게 빛났다. 사람들도 작게 빛났다. 빛나는 것들은 모두 특별한 음을 지녔으므로 저마다의 음계로 노래할 것이다. 기억하진 못해도 익숙한 손길로 건반을 쓰다듬으며 헤아려보는 진아의 마음을 용기 내서 들려주고 싶었다. 오래된 피아노가 노래했다. 까멜리아 싸롱에 별빛이 내렸다."

(112쪽)


고수리 장편소설 '까멜리아 싸롱'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3890465

서점 '책방연희 광화문'(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5길 19 1층)

https://instagram.com/chaegbangyeon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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