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가 하나의 ‘재난 상황’일지도 모르지만
의식의 흐름이라는 건 종종 꽤 무섭다. 플랫폼 자체를 그리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간혹 소소한 도움이 될 때가 있어 ‘나무위키’라는 곳을 가끔 본다. 작년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문서를 살피다가 출연 배우의 개별 문서를 이어서 보던 중 배우 김민정이 어릴 때 삼풍백화점의 개점 광고에 잠시 등장했다는 내용을 접했고, 곧이어 ‘삼풍백화점’ 관련 문서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미스터 션샤인> 문서를 보려 했지 삼풍백화점 문서를 볼 생각은 아니었다고 항변(?)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그 문서에는 백화점 건설 과정에서의 부실한 시공부터 1995년 6월 29일 붕괴 당일의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내용들까지 꽤 빼곡하게 적혀 있다. 외부로부터의 테러나 폭발 사고로 인한 것도 아닌, 건물 자체가 부실하게 지어져 자연적으로 무너진 초유의 사태였고 성수대교 붕괴를 불과 전년도에 겪었던 당시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도 대규모의 사고에 대응하는 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혀 있지 않을 때였기에 충격은 더했겠다. 이런 거야말로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 아니던가.
대표적으로 <해운대>(2009)나 <타워>(2012), <부산행>(2016)과 같은 몇 편의 재난 영화가 국내에서도 큰 흥행을 기록한 건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겪기 어려운 재난이 주는 외적 규모 내지는 심각성이 영화라는 엔터테인먼트와 만나 관객들의 기대감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시각적 효과만 두드러지지 않는다. 지진 해일이 몰려오고 초고층 마천루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혹은 온 나라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영화 속 누군가는 제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연인이나 자녀를 구하고자,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일을 막고자 스스로를 희생해 영웅이 되기도 한다. 이는 소위 ‘재난 영화’로 칭해지는 작품들이 한국 시장에서 흥행하기 위한 일종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엑시트>(감독 이상근)에는 상기 언급한 요소가 거의 없다. 보편적인 가족 정서에 의지해 관객들을 울리지도, 그렇다고 재난의 규모를 시각 효과로 강조해 전시하지도 않는다. 조정석과 임윤아가 연기한 ‘용남’과 ‘의주’는 비상구(EXIT) 표지판의 그 모습처럼 영화에서 오직 뛰고 또 뛴다. 누군가 유출시킨 유독성 가스가 도시에 확산되기 시작하고, 가스를 마신 시민들이 쓰러지는 가운데 근처 컨벤션홀에서 고희연을 벌이고 있던 ‘용남’의 가족들은 황급히 대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지상으로 가스가 퍼지자 사람들은 높은 건물 안으로, 옥상으로 올라간다. ‘용남’의 가족들이 있던 컨벤션홀도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옥상 출입문이 잠겨 있다는 것.
일단 짚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면 그건 <엑시트>가 ‘재난 영화’가 아니라 ‘오락 영화’에 가깝다는 점이겠다. <엑시트>는 가스를 유출시킨 범인의 사연이나 테러의 음모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정황상 짐작은 가능하지만 가스를 들이마신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져가는 모습 역시 길게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재난은 영화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오직 상황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관객이 집중하게 되는 건 ‘용남’과 ‘의주’라는 캐릭터 자체다.
‘용남’은 백수다. 대학 때 암벽등반 동아리 활동을 한 전력은 가족으로부터 ‘쓸모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동네 놀이터에서 철봉을 잡고 있는 것도 할 일이 없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 그의 어머니 ‘현옥’(고두심)이 고희연 잔칫날 아침 집에서 ‘용남’의 머리 가르마를 만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코믹하지만, ‘용남’은 자기 헤어스타일 하나도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물이다.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건 곧 무능력한 것이라는 낙인이기도 하다는 걸 영화는 그렇게 사소한 장면에서 보여준다. (그러나 후술할 내용에 따르면 취업은 성공의 충분조건일 수는 있어도 필요조건은 아닌 것 같다)
‘의주’는 ‘용남’의 가족들이 향하는 컨벤션홀의 부점장이다. 직급만 보면 그럴듯하지만 ‘의주’의 상사(점장)는 거의 추행에 가까울 만큼 ‘의주’에게 끈질긴 구애를 시도하는 남자다. ‘의주’는 ‘용남’과 같은 암벽등반 동아리 활동을 했고, 컨벤션홀이라는 일터가 본인이 희망한 곳인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 역시 ‘용남’에 비해 아주 처지가 나은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용남’을 가로막는 게 취업이라면 ‘의주’를 가로막는 건 직장 내 상사의 괴롭힘으로 인한 고충이다. 나를 가로막는 건 곧 재난이다.
구조 헬기가 실어 나를 수 있는 중량의 제한 등 몇 가지 상황으로 인해 건물 옥상에는 ‘용남’과 ‘의주’ 둘만 남는다. 이제 관객이 보게 되는 건 두 사람의 암벽 등반 경험이 어떤 ‘쓸모’를 발휘하느냐에 관한 것이지, 해묵은 로맨스도 누군가의 신파적 희생도 아니다. 두 사람이 탈출(EXIT)에 실패하는 결말을 상상하며 영화를 보는 관객은 거의 없겠지만, 그럼에도 처음 ‘용남’이 옥상 문을 열기 위해 건물 외벽을 오르는 상황부터 시작해 <엑시트>는 예상치 못한 지점의 유머를 수시로 집어넣으면서도 탈출 상황 자체가 주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103분이라는 지극히 짧은 상영시간이 말해주듯 <엑시트>는 재난 상황을 두 인물의 도움닫기를 위한 발판 삼아 명확한 목표만을 향해 달리는 영화다. 그러나 단지 웃고 즐기기만 하면 그만인 영화는 아니기도 했는데, 그건 앞서 소개한 ‘용남’과 ‘의주’의 삶이 처해 있는 ‘재난’의 양상 때문이다. 도심 속 가스 유출 사건은 물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적어도 <엑시트>의 세계에서는 그것보다 ‘용남’이 백수라는 것과 ‘의주’가 여성 직장인의 고충을 겪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 글 제목을 ‘영화 <엑시트>를 보면서 동시에 경험한 희망과 절망들’이라고 했다. 절망 이야기가 좀 더 사소한(?) 것이므로 먼저 하는 게 좋겠다. 이를테면 영화 <마션>(2015)을 보면서 ‘나는 문과니까 화성 가면 살아남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나는 평소에 등산을 즐기지도, 암벽등반을 해보지도 않았으므로 ‘용남’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 그저 건물 옥상에서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영화리뷰와 에세이를 쓰는 것도 재난 앞에선 별 쓸모가 없겠다고 생각하면... 잠시 눈물 좀 닦고.
하지만 <엑시트>를 본 700만 관객(8월 17일 기준)이 모두가 교훈을 느껴 내일부터 당장 암벽등반 동호회에 가입하진 않을 거다. 어쩌면 희망은 다른 곳에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짧은 에피소드 하나. ‘용남’과 ‘의주’는 고생 끝에 올라간 어떤 상가 건물 옥상에서 자신들을 발견한 헬기를 기다리던 중, 건너편 보습학원 안에 갇힌 아이들을 본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헬기가 아이들을 구조하도록 유도한다. ‘의주’는 엄마를 외치며 울먹이고 ‘용남’은 취업하면 꼭 사무실이 고층인 곳으로 갈 거라며 투덜대기도 하지만, 둘은 자신의 삶이 지금 처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설상가상의 위험한 진짜 재난 속에서도, 타인에게도 지금을 벗어날 기회를 주는 사람들이다.
영화 <엑시트>가 주는 희망이란 이런 것이다. 선의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한, 잘하면 이 세상은 더 나빠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암벽등반처럼 취업에 직접 도움이 안 되는 일도 쓸모가 있다는 것보다 더 희망적인 건 우리가 어떤 상황에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그들만의 기회가 /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능력들’ (...) 영화의 크레딧이 나올 때 나오는 이승환의 노래 ‘슈퍼히어로’의 가사를 곱씹으며 한 번 더 생각했다. ‘원더우먼’이나 ‘캡틴 아메리카’만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영웅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는 반드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이지는 않다. <엑시트>가 삶이 쓸모 있다는 희망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일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이 나 혼자만 사는 곳이 아니라서다. 삶의 갖가지 재난 속에서, 거기 찾아온 극한의 더 나쁜 재난 속에서, 나조차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식의 흐름을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은 모두가 나의 가능성을 ‘거기까지’라고 할 때, 스스로 그것을 뛰어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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