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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해 May 20. 2024

첫 만남

사교육과는 거리가 멀던 나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이 모인 과학고등학교를 준비하는 학원에 겁도 없이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학원 스케쥴은 빡빡했다. 월화수목금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수업과 자습이 이어졌고,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자습을 하러 학원에 나갔다. 거의 고3과 같은 스케줄이었다. 겨울방학에는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TV 채널을 돌리는게 낙이었던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웬만큼 공부를 해낸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미 중학교 과정을 끝내고 수학의 정석을 보는 학생들 사이에서 한껏 기가 죽어있었다. 매주 치르는 주간 테스트에서는 꼴찌를 도맡았다. 그동안 스스로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수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고, 특히 영어는 따라잡기가 더욱 버거웠다. 학원에서는 매일 50개씩 영어단어 시험을 봤는데, 20개를 넘게 맞추지 못하면 벌을 서고 20개를 넘길 때까지 재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당연히 매일 재시험 대상자였다. 듣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이 쉽게 받아쓰기 빈칸을 채우는 동안 나는 거의 한 칸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언제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 듣기 테이프를 재생했다.


요즘에는 MP3 확장자를 가진 영어 듣기 파일을 스마트폰에 다운받아 줄이 없는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듣겠지만, 내가 중학교에 다닌 시절에는 이제 막 MP3 플레이어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듣기 파일을 온라인에 공개하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영어책을 사면 영어책의 듣기 평가 테이프가 같이 들어있었고, 그걸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 넣어 듣곤 했다. 참고로 중학교 2학년이 되어 구입한 나의 MP3 플레이어는 254MB의 용량으로 (주의, GB가 아니라 MB이다.) 약 60곡을 저장할 수 있었다. 


학원에서는 수업만 듣는 게 아니라 자습 시간도 있었다. 자습 시간에는 선생님들이 가끔 들어와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감독했다. 나는 여느 날과 같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선생님이 감독을 들어와도 나는 영어 테이프를 듣고 있었으니 속된 말로 꿀릴 게 없었다. 그런데 뒤에서 어떤 아이가 선생님에게 나의 행태를 고해바쳤다. '선생님, 쟤 음악 들어요' 라며 말이다.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선생님은 교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선생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한쪽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서 자기 귀에 꽂아보았다. 나의 이어폰에서 영어 듣기 테이프가 재생되는 것을 확인하고, 선생님은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교실 문밖으로 향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를 고해바친 애는 인사를 해 본 적도 없는, 생판 모르는 아이였다. 안그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져있다는 생각에 위축된 마음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남의 사정은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 또 부당하게 선생님에게 고해바친게 너무나도 괘씸했다. 눈치챘겠지만, 이 아이가 지금은 나의 짝꿍이 되었다. 때린 사람은 모르고 맞은 사람만 기억한다더니 진짜 그렇다. 이 일화는 내 기억속에만 존재한다. 내가 몇 번이고 해당 일화를 얘기한 덕분에 짝꿍의 머릿속에는 가상 기억이 생겨났을 것이다.


나를 제멋대로 고해바친 그 아이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학원을 그만두었다. 영 재수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의 인생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고등학교 1학년 초여름, 우리는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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