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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sigma 이론에 관한 기억

by 노다해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기술과 가정 선생님이 ‘트리즈 이론’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책 표지 문구의 어떤 부분에 이끌렸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호기심이 갔다. 선생님께 찾아가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신에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부모님께 사달라고 해도 되었고, 도서관에서 구입신청을 해도 되었다. 왜 선생님께 빌려달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유난히 학생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선생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어렵게 느끼던 선생님이었지만 당돌하게도 나는 선생님께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님이 잠시 고민하시던 그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사실 책은 쉽게 빌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책이란 언제나 문턱없이 허용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본인들이 원하는 만큼 공부를 못했던 엄마아빠는 책과 공부에 관한 일에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래서 선생님이 뜸을 들이는 이유도 짐작이 가지 않았고, 평소 따로 대화를 한 번도 해본적 없던 내가 불쑥 찾아가 그런 부탁을 해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뒤늦게 걱정하기까지 했다.


‘트리즈 이론’은 최적화에 관한 이론이었다. 책에는 공장에서의 공정을 최적화하는 여러가지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실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공장에서 왜 그런 일을 하며 왜 문제가 되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독후감은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되어 신기했다‘는 말로 간신히 채웠다.


선생님은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은 훗날 남편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트리즈 이론을 담은 책에서는 다른 공정관리기법도 소개했는데, 그 중에는 식스 시그마 이론도 있었다. 공정의 결과물이 정규분포에서 +- 3 표준편차 이내에 즉, 6 sigma 안에 들도록 공정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남편은 대학에서 대표적으로 최적화 문제를 다루는 산업경영공학을 전공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이런 저런 최적화 이론에 관심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남편은 내가 6 sigma 이론을 알고 있다는 데에 무척 놀라워하며, 또래 중에 그런거 알고 있는 사람 처음 봤다고 했다. 내가 봤을 때는 거의 감명받은 수준이었다.


이제와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도 남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남편은 꼭 그게 아니었더라도 나와 관심사가 맞고 대화가 되서 좋았다고 했다. 분명 남편이 나를 먼저 좋아했건만, 남편은 과거의 기억은 곧잘 잊는다. 그런 탁월한 망각 덕분에 내가 남편에게 잘못한 일들도 쉽게 잊어버리고 나와 함께 사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잊었을지 모르지만, 꾸역꾸역 채워나간 독후감 덕분에 남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덧,


중학교 기술가정 선생님과 관련된 또 다른 기억이 있다.


학교가 끝난 늦은 오후,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학교에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복도에서 소방경보장치가 울렸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복도를 지나가다가 문득 위치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게 바로 과학시간에 배운 정상파구나!’ 라는 깨달음에 취해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뭐하느냐고 물으셨다. ‘소리가 달라져요’라며 선생님도 이 감동을 느끼실지 궁금했지만, 선생님은 별 반응없이 가던 길을 가셨다.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어서 감흥이 없던걸까? 하지만 책에 그림으로만 보던 정상파를 직접 느끼다니 너무 신기했던 나는 그날의 깨달음의 순간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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