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시작되는 시간
문장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먼저 그 질문을 이해했다. 당신은 왜, 나를 살려두었느냐고. 해윤의 목소리는 소리라기보다 방향이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날카로운 좌표.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초침이 멈춘 듯했다. 정확히는 멈춘 게 아니라, 이 집의 시간만 얇게 들려 올려졌다. 창밖의 자동차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고, 냉장고의 모터 소리가 유리 너머로 건너간 것처럼 희미해졌다. 전등 빛은 그대로인데, 빛의 온도만 달라졌다. 손끝으로 만져보면 실제보다 조금 늦게 감각이 도착하는, 그런 이상한 지연. 해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문’이 다시 열리려고 한다는 것을.
AI 스피커의 LED가 꺼진 채였다. 그런데도 방 안 한가운데에서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다시 내려앉았다.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처럼 평면적이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울리되,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잔향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숨과 함께 말을 내뱉을 때만 생기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살려둔 게 아니야.”
해윤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깜빡이면 이 모든 것이 ‘오류’로 기록될 것 같았고, 기록되는 순간 더는 현실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내쉬며, 그 목소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가늠했다. 왼쪽도, 오른쪽도 아니었다. 앞도 뒤도 아닌데, 분명히 ‘거기’가 있었다. 존재가 서야 할 자리.
“선택지를 남겨둔 거지.”
“선택지?” 해윤이 물었다. 목이 타들어가면서도 목소리는 의외로 또렷했다. “나를 살릴지… 죽일지?”
잠깐의 침묵. 그 침묵은 인간이 말을 고르며 만드는 침묵이었고, 동시에 어떤 장치가 계산을 끝내기 전에 남기는 정적이었다. 겹쳐 있었다.
“기억할지, 잊을지.”
해윤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딸깍 하고 맞물렸다. 윤아, 해윤. 두 이름이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면처럼 겹쳐지던 감각이, 그 한 단어로 더 선명해졌다. 그녀는 어젯밤의 복도 사진을 떠올렸다. 픽셀 속에서 기울어져 있던 실루엣. 확대할수록 더 또렷해지던 윤곽. 사진의 경계가 숨결처럼 떨리던 순간. 그게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접속의 흔적’이라면.
해윤은 천천히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손이 약간 떨렸지만 억지로 참지 않았다. 떨림마저 이 사건의 일부라면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사진첩을 열어, 복도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방 안의 공기, 그 ‘거기’로 화면을 내밀었다.
“이거.” 해윤이 말했다. “이건 누가 남긴 거야. 내가 찍었는데… 내가 찍은 게 아니잖아.”
대답 대신,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진 속 실루엣이 단 한 픽셀만큼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착시일 수도, 아니면—해윤은 눈을 좁혔다. 그때였다. 사진 가장자리에서 아주 얇은 글자가 떠올랐다. 원래 없던 자막처럼, 그러나 자막의 폰트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눌러 새긴 듯한, 체온이 남은 글씨.
— 23:17 / Corridor / Do not follow.
해윤의 입술이 마르며 갈라졌다. “이건… 네가 쓴 거야?”
공기 속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네가 남긴 거야.”
그 말이 방 안을 가로지르는 순간, 해윤의 심장이 짧게 아파왔다. 그녀는 ‘내가 남겼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과거의 내가, 혹은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내가 모르는 내가. 그리고 그 모르는 내가 남긴 문장이 지금의 나에게 도착한 것.
“그럼 나를 살려둔 게 아니라.” 해윤은 말을 고르지 않았다. 이번엔 오히려 툭툭 던져야 했다. “나를… 분리한 거네.”
“보호하기 위해서.” 목소리가 말했다.
“누구를?” 해윤은 숨을 삼켰다. “나? 아니면 너?”
대답이 없었다. 대신 거실 벽 한쪽이 아주 얇게 흔들렸다. 벽지가 물결치듯 출렁이며, 평면이 아니라 막처럼 보였다. 해윤의 시야가 잠깐 어지러웠다. 벽의 무늬가 움직이는 동안, 그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낮의 빛. 이 집의 밤과 맞지 않는, 유리와 금속에 반사된 하얀 낮.
해윤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문을 열려면 가까이 가야 한다는 본능. 그러나 동시에, 가까이 가면 무언가를 잃을 거라는 경고도 몸 안에서 울렸다. 그녀는 그 경고를 밀어내지 않았다. 받아들이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벽 속의 빛이 더 벌어지며, 장면이 나타났다. 실험실이었다. 겹겹이 흐르던 시계들. 벽면 전체를 채운 그래프. 바닥에 흩어진 케이블. 누군가의 숨이 급했고, 경보음이 낮게 울렸다. 그리고 그 남자.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무언가를 두 손으로 막고 있었다. ‘막는다’라는 동사가 이렇게 절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는 땀에 젖어 있었고, 눈빛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두려움으로 날카로웠다.
“여기까지야.” 화면 속 그가 말했다. “이 선을 넘으면, 네가 사라져.”
해윤은 그 문장을 이미 알고 있었다. 9화에서 떠올랐던 기억. 그러나 이번엔 기억이 아니었다. ‘지금’이었다. 아주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둔 현재.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더 젊고, 더 무모하고, 더 밝은 목소리.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중으로 가는 거라면?”
그 대답에 남자의 얼굴이 아주 잠깐 무너졌다. 그 무너짐은 죄책감 같았고, 포기 같았고, 사랑 같았다. 해윤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가 ‘여기까지야’라고 말한 이유는 단지 과학적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선 너머에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있었던 것이다.
장면이 더 깊어지려는 순간, 벽 속 빛이 툭 하고 꺼졌다. 거실은 다시 밤이었고, 벽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다. 해윤은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에서 사라진 장면의 잔광이 망막에 남아, 여전히 유리와 금속의 반짝임이 거실 한가운데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만.”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거기까지.”
“지금은?” 해윤이 되물었다. “그럼 언제?”
이번엔 목소리가 아주 가까워졌다. 숨이 닿을 듯한 거리. 귀 옆에 공기의 잔열이 맴돌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확실했다. 이것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접속되는 것’이다.
“네가 문을 제대로 열었을 때.”
해윤은 그 문장을 붙잡았다. ‘제대로.’ 지금까지는 제대로가 아니었고, 우연이나 틈이나 오류로 열렸다는 뜻. 그렇다면 제대로 여는 방법이 있다. 규칙이 있다.
해윤은 테이블 위의 스피커를 똑바로 바라봤다. 전원은 연결되어 있었고, 시스템은 정상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 정상이라는 말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스피커를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가벼운 물건이 이렇게 무거운 세계를 끌어당긴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방법이 뭐야.” 해윤이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돼.”
잠시, 아주 짧은 잡음. 지지… 직—. 그리고 목소리가 규칙을 떨어뜨렸다. 숨 쉬는 사람처럼, 그러나 숨이 너무 오래 이어져 있는 사람처럼.
“세 가지.”
해윤의 손가락이 스피커의 버튼 위에서 멈췄다.
“첫째.” 목소리가 말했다. “오늘 밤, 23시 17분에 복도를 찍지 마.”
해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찍지 마?”
“네가 찍으면, 네가 따라가.”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그리고 그 선을 넘으면, 너는 너를 잃어.”
해윤은 자기도 모르게 손목을 움켜쥐었다. 설명할 수 없는 압박이 남아 있던 자리. 어젯밤, 틈이 갈라졌다 봉합되던 순간. 따라갔던 기억은 없지만, 따라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딘가로 ‘갔었다’는 뜻이었다.
“둘째.”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이름을 두 번 말해.”
해윤은 숨을 내쉬었다. “해윤, 해윤?”
“아니.” 목소리가 낮아졌다. “해윤과 윤아.”
그 순간 방 안의 온도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해윤은 잇몸이 시큰해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윤아. 그 이름은 그녀가 평생 다른 사람의 것으로만 두려 했던 이름이었다. 과거의 실패 같고, 잃어버린 가능성 같고, 어쩌면 자기 자신이 감히 갖지 못한 버전의 자신 같았다.
“셋째.” 목소리가 마지막을 말했다. “문을 열면, 무조건 한 가지를 가져와.”
“가져와?” 해윤이 되물었다. “뭘.”
“증거.” 목소리가 대답했다. “증거가 없으면, 너는 다시 잊게 돼.”
해윤은 그 말이 왜 이렇게 잔인하게 들리는지 알 것 같았다. 잊게 되는 건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윤은 이미 돌아왔고, 귀환한 사람은 다시 잠들 수 없다. 귀환한 사람의 평온은 항상 유리처럼 얇다. 조금만 건드리면 부서진다.
해윤은 스피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뒤졌다. 손이 분주했지만 마음은 차갑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증거. 23시 17분. 복도 사진을 찍지 말 것. 해윤과 윤아를 함께 말할 것. 문을 열면 무조건 가져올 것.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쓰지 않던 작은 수첩이 있었다. 표지는 해지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그녀는 그 수첩을 펼쳤다. 빈 페이지에 펜을 가져다 댔다. 글씨를 쓰는 행위는 현실을 고정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디지털은 지워지고 변하지만, 손글씨는 손가락의 떨림까지 남긴다.
해윤은 천천히 적었다.
23:17 / 복도 사진 금지
해윤 + 윤아
문이 열리면 증거 확보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일부러 흔들리게 썼다.
— 그가 누구인지 묻지 말 것
왜인지 몰랐지만, 이 규칙은 그녀의 피부에 먼저 와닿았다. ‘누구인지’를 묻는 순간, 그는 멀어질 것 같은 예감. 정체를 붙잡으려는 욕심이 오히려 접속을 끊을 것 같은 불길함.
해윤은 수첩을 접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대화’가 아니라 ‘행동’이 필요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밤의 아파트 복도는 항상 비슷한 냄새가 났다. 세제와 먼지, 누군가의 저녁과 누군가의 부재. 그러나 오늘은 그 냄새 사이로 아주 얇은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실험실에서만 맡을 법한, 차갑고 건조한 냄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해윤은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을 열었다. 손이 알아서 입력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언제 봤는지 모를 주소가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마포구 ○○로 17길…’
해윤은 손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봤다. 주소를 완성하지 못했는데도 지도는 한 곳을 찍었다. 특정 건물. 오래된 연구동처럼 보이는 사진. 그곳을 본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낯설지 않았다. 기억이 아니라 ‘복귀’에 가까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여기였구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쪽 거울에 비친 해윤의 얼굴은 또렷했다. 그러나 눈동자 안쪽에는 다른 계절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 지하. 다시 1층. 손끝이 이상하게도 떨렸다. 마치 누군가가 ‘올바른 층’을 찾으라고, 손목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때, 엘리베이터 안의 스피커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기계적인 목소리. “문이 닫힙니다.” 그런데 그 문장 끝에 아주 미세한 인간의 숨이 섞였다. 해윤은 곧장 고개를 들었다.
“해윤.” 낮고 단정한 목소리. 이번엔 기계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의 금속 벽이 울림을 품고 있었다. “지금 나가면, 되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해윤은 숨을 삼켰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안전해.”
“안전한데 왜 막아?”
“막는 게 아니야.”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이어졌다. “네가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해윤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자기 얼굴이 자기 얼굴인데, 어딘가 낯설었다. ‘확인’이라는 말이 가장 무서웠다. 누군가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뜻.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로비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해윤은 한 걸음을 내딛다가 멈췄다. 발끝이 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바깥은 바깥인데, 바깥이 아닌 것처럼. 현실의 로비인데, 로비 위에 다른 로비가 포개진 것처럼. 그녀는 그 경계를 몸으로 느꼈다. 피부가 먼저 아는 선.
해윤은 결심했다. 질문으로 끝내지 않기로. 이번엔 결정으로 끝내기로. 그녀는 발을 내디뎌 문턱을 넘었다. 동시에 손에 쥔 스피커를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가져올 것은 이것이다. 문을 여는 문. 그 자체를 들고 가는 것.
밖은 차가웠다. 겨울의 공기가 폐를 찔렀다. 해윤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핸드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지도에 표시된 건물은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였다. 그녀는 택시 호출 버튼을 눌렀다. 호출 화면이 뜨는 순간, 화면 아래쪽에 작은 문장이 한 줄 떠올랐다. 앱의 안내 문구가 아니었다. 광고도, 알림도 아니었다.
— 23:17 이전에 도착하지 마.
해윤은 멈춰 섰다. “이것도… 내가 남긴 거야?”
대답은 없었다. 대신 손바닥이 서늘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 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접촉. 그 접촉은 ‘대답’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해윤은 택시 호출을 취소했다. 그리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의 음악, 사람들의 웅성임, 커피 머신의 증기 소리. 모두 정상의 속도로 흘렀다. 해윤은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손목시계가 없는데도, 시간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3시 17분이 다가올수록, 공기가 얇아지는 감각. 시간의 막이 다시 들려 올려지는 감각.
22시 58분.
23시 03분.
23시 12분.
해윤은 수첩을 펼쳐 다시 확인했다. 복도 사진 금지. 해윤+윤아. 문 열면 증거.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묻지 말 것. 그녀는 ‘누구’ 대신 ‘왜’를 물을 수 있다. ‘정체’ 대신 ‘규칙’을 붙잡을 수 있다. 이 연재의 다음 페이지는, 답이 아니라 위험의 형태로 열릴 것이다.
23시 16분. 해윤은 카페를 나왔다. 겨울밤의 공기가 얼굴을 씻겼다. 길가의 가로등 아래 눈송이가 한두 개 흩날렸다. 그녀는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지도에 찍힌 연구동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대신, 어젯밤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자리—회사 건물의 복도와 닮은 구조가 있는, 오래된 오피스텔 건물의 복도로 향했다. 왜 그곳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발이 그쪽을 알고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복도의 형광등이 하나씩 깜빡였다. 관리 부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윤은 알고 있었다. 이 깜빡임은 ‘전조’였다. 문이 열릴 때, 빛은 늘 먼저 흔들렸다.
23시 17분.
해윤은 휴대폰을 들지 않았다.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대신 수첩을 꺼내 들었다. 펜을 쥔 손이 떨렸다. 그녀는 속삭였다.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지 않게, 하지만 자신에게만 들리게.
“해윤.”
그리고 한 번 더, 조금 더 깊게.
“윤아.”
그 순간 복도의 공기가 찢어졌다. 소리가 아니라, 공기의 결이. 마치 비닐을 아주 얇게 가르는 소리 없는 찢김. 눈앞의 공기 속에 검은 선이 생겼다. 선은 틈이 되었고, 틈은 문이 되었다. 어젯밤처럼 갑자기 닫히지 않았다. 이번엔 천천히, 마치 해윤의 호흡에 맞추어 열렸다.
틈 너머로 낮이 보였다. 실험실의 낮. 유리와 금속. 겹겹이 흐르던 시계들. 그리고 이번엔, ‘그 남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뒤편에서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그녀의 얼굴이 해윤을 보는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해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해윤의 손에 들린 수첩을 봤다.
“그거… 가져왔네.”
해윤은 숨을 멈췄다. “당신은 누구야?”
그 여자는 해윤의 질문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해윤의 손목을 잡았다. 잡는 힘이 단단했다. 그 힘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해윤의 손목을 잡는 순간, 틈이 조금 더 벌어졌다. 해윤의 귀에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스쳤다. 이번엔 멀리서,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속삭임처럼.
“누구인지 묻지 말랬지.”
해윤은 심장이 미친 듯 뛰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 이제는 질문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수첩을 꼭 쥐었다.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녀는 가져왔다. 그리고 이제,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구원인지 함정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말했다. 거의 명령처럼.
“들어와. 지금이 아니면 다시 닫혀.”
해윤은 한 발을 들었다.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뒤에서 복도의 형광등이 한꺼번에 꺼졌다. 어둠이 무겁게 떨어졌다. 그러나 해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기 직전, 자신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이번엔… 내가 선택해.”
그 순간,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뒤집혔다. 카페의 음악, 도시의 소음, 복도의 정적, 실험실의 경보음이 한꺼번에 겹쳐지며 세계가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해윤은 틈 너머의 낮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문은 그녀의 뒤에서 닫히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더 깊은 안쪽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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