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다 먼저 남은 사랑
문은 그녀의 뒤에서 닫히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숨을 고르듯 더 깊은 안쪽으로 열렸다.
해윤은 한 발을 옮기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느꼈다. 공기가 달랐다. 냄새나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밀도였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가 이전보다 무거웠고, 숨을 들이쉴수록 가슴 안쪽이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 공간이 해윤의 존재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심박, 체온, 그리고 감정까지.
바닥은 금속처럼 단단했지만, 미세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바닥도 아주 약하게 울렸다. 살아 있는 공간. 아니, 누군가의 시간을 대신 품고 살아남은 공간에 가까웠다.
가장 먼저 들린 것은 시계 소리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시간이 서로 다른 속도로 돌아가며 겹쳐지는 소리. 빠른 초침, 느린 분침, 멈춘 시계가 내는 기묘한 잔향. 해윤은 고개를 들었다. 벽마다 시계들이 걸려 있었다. 어떤 것은 거꾸로 돌고 있었고, 어떤 것은 분침만 남아 있었으며, 어떤 것은 멈춰 있는데도 분명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숨, 크게 쉬지 마.”
곁에서 들린 목소리에 해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해윤의 팔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손목을 잡던 힘보다는 느슨했지만, 놓지는 않았다. 놓으면 해윤이 다시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의 손이었다.
“당신은…”
해윤이 말을 꺼내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만 말할게.”
짧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서린.”
해윤은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한 번 굴렸다. 서린. 차갑고도 아린 이름.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었다. 해윤은 숨을 얕게 고르며 뒤를 돌아봤다. 문은—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명확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았다. 공기 속에 검은 선 하나가 남아,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닫히지도, 완전히 열리지도 않은 상태. 안과 밖의 경계가 미완성인 채로.
“왜… 닫히지 않아?”
서린은 잠시 입술을 눌렀다.
“네가 뭘 가져왔는지, 아직 확인이 안 됐거든.”
“가져온 거라면…”
해윤은 무의식적으로 가방을 움켜쥐었다. 수첩. AI 스피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확신.
“난 그냥 들어왔어.”
“아니.”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네 시간에서 무언가를 두고 왔어.”
그 말이 끝나자, 실험실 중앙에 투명한 구조물이 서서히 드러났다. 유리 같기도, 금속 같기도 한 재질. 표면은 반사되다가도 속을 드러냈다. 구조물 안에는 의자 하나와 센서들이 늘어져 있었고, 그 주위의 공기만 유독 다른 결로 모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방금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해윤의 심장이 이유 없이 빨라졌다. 두근거림이 아니라, 안쪽에서 조여 오는 통증. 스무 살부터 매년 같은 날, 같은 꿈을 꾸고 난 뒤 남던 통증과 닮아 있었다. 얼굴 없는 남자의 품에서 깨어나 울던 밤들.
“… 여기.”
해윤이 낮게 말했다.
“꿈에서 느끼던 온도랑 같아.”
서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놀람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꿈이 아니었어. 네가 견딜 수 있게 접속된 기억이었지.”
접속.
그 단어가 해윤의 가슴을 찔렀다. 꿈이라는 말이 너무 무해해서, 이 모든 걸 가려왔다. 접속은 책임을 동반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연결했다는 뜻이니까.
“그는 어디 있어.”
해윤의 질문에 서린은 구조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잡음이 흘렀다.
지지… 직—.
기계음이 아니었다. 숨이었다. 사람의 숨이, 기계의 틈을 빌려 지나가는 소리. 해윤은 그 소리만으로도 알았다. 그가 여기 있다는 걸. 완전히는 아니지만, 반쯤.
“… 해윤.”
낮고, 다정한 목소리. 단정하게 눌러 담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 오래 기다린 사람의 목소리였다. 해윤은 그대로 무릎이 풀려 바닥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찔렀다. 그래야 이게 현실이라는 걸 붙잡을 수 있었다.
“들려.”
해윤의 목소리는 울음을 참느라 갈라졌다.
“너… 정말 여기 있구나.”
짧은 숨. 웃음을 삼키는 숨.
“여기라는 말은… 아직 조심해야 해.”
“왜?”
해윤은 고개를 들었다.
“왜 항상 조심해야 해?”
대답 대신 서린이 재빨리 해윤의 어깨를 눌러 구조물에서 떨어뜨렸다.
“가까이 가지 마. 지금은—”
“아직 아니야.”
목소리가 서린의 말을 이어받았다.
“지금은 아직.”
해윤은 그 말투를 알아봤다. 문장을 끝내지 않는 방식, 쉼표가 많은 호흡. 꿈속에서 자신을 끌어안던 남자의 말투. AI 스피커에 섞여 들어오던 음성. 이헌.
그 이름이 혀끝까지 올라왔을 때, 서린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 이름 말하지 마.”
그러나 동시에, 아주 낮은 속삭임이 해윤의 귀를 스쳤다.
“아직은.”
해윤은 숨을 고르며 질문을 바꿨다. 규칙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나를 찾았어.”
누구인지가 아니라, 왜.
잠시, 공기만 움직였다. 시계 소리가 한 박자 느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침묵 속에서 해윤은 깨달았다. 스무 살부터 반복된 꿈이 우연이 아니라 약속이었다는 걸. 누군가 매년 같은 날, 같은 온도로 그녀를 불러왔다는 걸.
“네가 살아야 했으니까.”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해윤의 가슴이 뜨겁게 죄어 왔다.
“내가… 살아야 했으니까?”
웃고 싶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너는 어디에 있는데 그런 말을 해.”
“여기.”
“그리고, 여기 아닌 곳.”
서린이 콘솔을 켰다. 그래프들이 동시에 요동쳤다.
“연결률 상승. 감정 파동 한계치 접근.”
서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희 둘이 너무 빨리 가까워지고 있어.”
‘너희 둘.’
해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억도 없는 두 사람이 ‘둘’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사랑은 기억보다 먼저 둘을 만든다. 해윤은 스무 살부터 그것을 몸으로 배워왔다.
“그럼…”
해윤은 숨을 삼켰다.
“내가 꾸던 꿈도… 네가?”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내가 아니라.”
“그럼?”
“네가.”
“내가…?”
“네가 나를 놓지 못했어.”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너는 잊었는데, 너의 감정이… 나를 붙잡았어.”
해윤은 눈을 감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은 늘 따뜻했다. 꿀처럼 흐르던 시선. 말없이 안아오던 팔의 힘. 현실보다 더 현실 같던 품.
“얼굴은 왜…”
해윤은 질문의 끝을 바꿨다.
“왜 항상 안 보였어.”
짧은 웃음.
“너를 살리려고.”
“얼굴을 보면 내가 죽어?”
“죽음은 너무 단순해.”
그가 말했다.
“너는 네 시간을 잃을 거야.”
서린이 낮게 덧붙였다.
“그는 오래전에 자기 시간을 포기했어. 그래서 네 시간이 흔들려.”
해윤은 서린을 바라봤다.
“너도 그를 알아.”
서린은 대답 대신 서랍에서 낡은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작은 USB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해윤의 숨이 멎었다.
“그거…”
손이 앞으로 나갔지만 서린이 막았다.
“만지지 마.”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게 네 꿈의 시작이야.”
해윤의 가슴이 무너졌다. USB. 목소리를 담아 남겼다는 그것. 실종되기 직전, 단 하나의 흔적.
“그는…”
해윤이 겨우 말했다.
“나를 사랑했어?”
잠시 침묵. 그리고 대답.
“그래.”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서 남았어.”
“왜 말 안 했어.”
해윤의 눈이 젖었다.
“왜… 그렇게 혼자서.”
“말하면, 네가 남았을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이번엔… 네가 살아야 했어.”
그 말에 해윤의 심장이 완전히 무너졌다. 스무 살의 꿈, 반복된 그리움, 이유 없는 눈물. 전부 그 선택의 여파였다.
“그럼 이제…”
해윤이 떨리는 숨으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돼.”
“선택해야 해.”
그가 말했다.
“기억을 돌려받을지, 아니면 이대로 살지.”
해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기억해도 괜찮아.”
목소리가 단단했다.
“이번엔… 내가 도망치지 않을게.”
잠깐의 침묵.
그리고 아주 낮은 숨.
“그래도 묻고 싶어.”
그가 말했다.
“기억나면… 나를 떠나야 해도 괜찮아?”
해윤은 망설이지 않았다.
“괜찮아.”
그리고 덧붙였다.
“그건 내가 선택할 일이니까.”
서린이 USB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재생하면, 되돌릴 수 없어.”
해윤은 USB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놓지 않았다.
“알아요.”
USB를 꽂는 순간, 파일 목록이 떠올랐다.
HY_01
마지막으로
네가 들을 수 있다면
해윤은 재생을 눌렀다.
그리고 들렸다.
녹음된 숨, 떨리는 호흡, 말문을 열기 전의 침묵.
“… 해윤.”
400년의 시간이, 단 한 번의 울림으로 무너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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